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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희 Feb 06. 2022

창문 넘어 도망친 소설들

영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가브리엘 마르케스, 에밀 졸라의 글을 좋아해요.

 

작가가 아니라 소설들을 말해달라고요? 가장 애정하는 소설은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예요.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빼놓을 수 없는 소설이에요. 이것도 소설이라 할 수 있다면 프란츠카프카의 꿈도 말하고 싶어요.




아 한국 소설이요?


최인훈의 광장이요. 


지금, 현존하는 작가들의 소설을 말해달라고요? 


나는 아직까지 가장 사랑하는 현대소설과 한국 작가가 없다. 아이들과 함께 소설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신이 나서 세계 문학을 읊어댔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가브리엘 가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에밀 졸라의 소설들을. 


 우리 집엔 한국 문학보다 세계 문학이 많았다. 20대 시절 엄마가 사 모은 세계 문학들은 그대로 나의 책이 되었다. 나는 10대 시절부터 수많은 세계 문학들을 접할 수 있었다. D.H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에서 폴과 마리안의 사랑을 보고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필립 로스의 콜럼버스여 안녕에서 대범한 것들을 떠올렸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노동자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물론 서양문학과 중남미 문학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들은 또 다른 문체들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번역본이어서 과연 정말로 그의 문체였을지 의문이지만. 



한국 작가. 한국 현대소설 작가.




곧 사랑하게 될 너의 작가들은 누구야



오늘은 이제 사랑하게 될 작가들과 그들의 소설에 관한 이야기다. 





 실은 말이다. 10대 시절, 정유정의 모든 소설들을 좋아했다. 그가 썼던 악에 관한 소설들 이전 청소년에 관한 소설부터 모든 책들을 찾아 읽었다. 어떻게 하면 사건에 대한 묘사를 이렇게 할 수 있을까. 한 번 책을 들면 다 읽을 때까지 내려놓을 수 없다는 건 이런 걸까. 감탄에 감탄을 더하곤 했던 그의 소설들.




지금은 누구의 글을 읽어


 20대의 가장 처음엔 권여선의 글들을 읽었다. 슬픔을 그만의 문체로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순간들이 좋았다. 그 누구도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설픈 공감은 오히려 타인에 대한 동정과 모욕이 된다. 권여선은 세상의 어둠들에 대해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묘사하고 있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울고 싶을 땐 구병모의 글들을 읽었다. '위저드 베이커리'로 10대 시절 처음 접했던 구병의 문체는 충격적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구병모의 등장인물이 되어 있었다. 20대가 되어 있는 구병모의 글들은 나에게 또 다른 충격을 안긴다. 구병모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독특한 공포 속에서 나는 나만의 두려움을 모아갔다. 나 또한 이 두려움으로 나만의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선 정세랑의 글들을 읽었다. 정세랑의 세계관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세계였다. 정세랑만의 판타지 속에서 잊혀 있었던 나의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낸다. 잃어버린 나만의 세계를 찾아서. 




언제부터 판타지를 꿈꿨지? 


 아홉 살, 처음으로 해리포터를 읽었다. 그땐 제7권 죽음의 성물이 나오기 전이어서 해리포터는 총 6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만의 캐릭터를 만들었다. 제니퍼 제레우스.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지내온 외로운 소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슈퍼 소녀. 훗날 가장 친한 친구와 적이 되지만, 그 순간 역시 슬기롭게 대처해나가는 소녀. (그리고 1년 후 타라 덩컨이 나왔다. 제니퍼 제레우스를 출간할 계획이었던 10살의 지민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호그와트에 가기를 꿈꿨던 나는 11살 때 짐을 쌌다. 눈을 뜨면 학교에 가는 게 두려웠던 순간들 속에서 곧 나를 찾아올 맥고나걸과 해그리드를 기다렸다. 해리의 생일은 7월 11일, 해리를 데리고 간 다음 나를 데리러 올 테지. 이 어둠 속에서 나를 구하러 와줄 거야. 그런 적이 있었다. 옷가지를 챙겨놓고, 나뭇가지를 꺾어 주문을 연습했다. 그리고 생일날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주문을 외웠다. 한국의 만나이니 12살을 기다리자. 그리고 그렇게 열두 살이 됐다. 그리고 다시 해가 지나간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됐다.



 정세랑은 그런 나의 세계를 다시 일깨워준 작가. 정세랑의 세계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사랑을 말한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의 글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 같다. 과연 나의 글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내 글엔 사랑이 있을까?






 지금은 박솔뫼의 글을 읽는다. 누군가 그랬다. 박솔뫼의 글은 영화를 보는 것만 같다고. 그렇다. 박솔뫼의 문장들을 읽고 있으면 영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속이 답답할 박솔뫼의 글을 읽자. 그의 글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권여선, 구병모, 정세랑, 박솔뫼. 나는 또 누군가의 글을 좋아하게 될까. 그리고 누구의 글과 사랑에 빠지게 될까. 




 나도 그들과 같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을 쓰고 있으면 누군가 다가와서 묻곤 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뭐야 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침묵 끝에 내놓을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 이 글을 다 쓰면 알려줄 거야. 글이.


일단 글을 다 써보면, 글이 해답을 줄 거야.



오늘도 나는 목적을 알 수 없는 글을 쓴다. 다 쓰는 순간, 마지막 문장을 끝맺음하는 순간, 글이 알려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글의 독자를, 주제를, 목적을.






* <교차로입니다 서행하세요>의 열 번째 글입니다. 이 매거진은 같지만 다른 점이 많은 두 친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 각기 다른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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