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 <작은 동네>
진실은 보통 어디에 있을까? 말속에? 행동 속에? 그것도 아니면 기억 속에?
1849년 11월 16일, 만 28세의 소설가 도스토옙스키가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그에게는 무엇이 진실이었을까?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 그것이 그에겐 진실이었을까? 이후에 그는 '4년 강제노역형과 사병 추가 복무'로 감형을 받았는데, 그때서야 그 모든 과정이 차르 니콜라이 1세의 각본이었음이 밝혀졌다. 젊은이들을 겁주기 위해 행해진 권력의 장난.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후에 그에게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사실은 모두 거짓말이고, 나는 거기에 속은 거야.' 그것이 그에게 진실이었을까? 그는 그걸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때로 진실은 너무 가혹하다. '기억'이라는 사실 안에 숨어 있는 진실은 때때로 알아차릴 시간도 주지 않고 그렇게 흘러가 버린다. 손보미의 <작은 동네>는 한 여자의 기억 속에 숨어있던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녀가 살았던 작은 동네, 그녀를 사랑했던 부모,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기억. 그것은 모두 그녀에게 '사실'이었다. 그들은 실재하는 사람이었고, 그 동네는 실재하는 공간이었고, 그 사랑도 실재하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진실은 어디에 있었는가?
세상을 둘러싼 온갖 사건사고 속에서 그것은 더욱 찾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린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다리가 무너졌다는 사실, 불이 났다는 사실, 그곳에는 '사실'만 있다. 뉴스는 사실만을 보도하니까, 당연히 사람들도 사실만을 본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책의 이야기 속에서도 수많은 사실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책을 읽는 우리는 그 사실들에 이끌려 정신없이 책을 읽어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책을 덮은 후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그곳엔 아무런 진실도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말속에서, 행동 속에서, 그리고 기억 속에서 진실을 찾는 일은 이미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서 진실은 아무런 힘이 없고, 어느 누구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으니까. 하지만 시선을 개개인으로 좁히면 말이 달라진다. 세상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던 일도 개개인에겐 커다란 일이 되듯이, 세상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던 진실도 개개인에겐 중요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때때로 불행의 옷을 입고, 거짓의 옷을 입고 찾아온다. 그래서 그것을 맞이하는 일은 때때로 두렵기도 하다. 또한 진실은 사실을 왜곡하기도 하고, 사실을 동조하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진실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진실은 무섭다. 진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나는 글을 쓸 때 추상적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진실' 같은 단어가 그렇다. 추상적인 단어. 그렇다 진실은 추상적인 단어다. 하지만 동시에 '진실'이기 때문에 '사실적인 단어'이기도 하다. 진실이 추상적일 수는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담고 있는 단어가 추상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실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