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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이 Nov 20. 2021

끝없는 악의 연대기

드라마 <지옥>

전래동화를 보면 선(善)과 악(惡)의 대립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야기가 많다. 흥부는 선이고, 놀부는 악이다. 콩쥐는 선이고, 팥쥐는 악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대립이 가지고 있는 교훈은 뭘까? 바로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것이다.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라. 이것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배워온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가까웠다. 하지만 자라고 난 뒤에 바라본 세상은 이러한 원칙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법은 때때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더 가까웠고, 사람을 죽인 사람에게는 고작 10년 안팎의 형이 선고되었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피해자의 가족에게 법은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때때로 누군가는 법을 벗어나 사적인 복수를 행하기도 했다. 넷플릭스의 <지옥>도, 올해 상반기 SBS에서 방영됐던 <모범택시>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다.


악을 처벌하는, 그럼으로써 스스로 악이 되는 사람들.


<모범택시>는 억울한 피해자들을 대신해 사적으로 복수를 해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함부로 착취한 악덕 사장, 학교폭력의 가해자, 성범죄자 등 우리가 흔히 '악'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통쾌하게 처단하는 모습을 보인다. 드라마 <지옥>도 마찬가지다. 죄인들의 앞에 죽음을 집행하는 사자가 나타나고, 사자는 그들을 처참하게 불태워 죽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정의'라고 이름 붙인다. 죽기에 마땅한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 마땅하다는 논리. '악'의 반대말은 '선'이니, 악을 처단하는 이들도 선일까?


<지옥>은 사자들의 죄인 처벌을 이용하는 '새진리회'라는 조직에 대해 이야기한다. 일종의 종교 조직인 그들은 사람들의 심리를 간사하게 악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정의에 열광하고, 정의롭게 보이고 싶어하는 그들의 마음을 이용해 세상을 더욱 혼란스러운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의에 심취한 사람들은 제멋대로 법의 심판자가 된다. 무력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때로는 죽이기도 하면서 그것을 '정의'라고 믿는 것이다. 작년 말, 조두순이 출소했을 때 그의 집 앞에 몰려갔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정의를 외치면서 조두순을 더욱 강한 처벌에 처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들 중에는 조회수를 높이고자 했던 개인방송 BJ도 있었다. 동네 주민들은 생활에 피해가 간다고 '그만하라'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은 '정의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끝없는 소란을 멈추지 않았다. 과연 그들 중에서 진정으로 피해자를 위하고, 정의를 위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넷플릭스 <지옥> 공식 스틸컷

범죄자에 대한 개인의 처벌은 끝없는 논란이 되어왔다. '법이 부실하다고 하여 그것을 개인이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 너무 부실하여 개인이라도 나서서 처벌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했다. 어느 쪽이 더 옳은 것인지는 개인의 판단 여부에 달린 것이겠지만,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점은 '과연 사적 처벌의 목적이 정말 정의구현에 있느냐'는 것이다. 드라마 <지옥>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그저 정의로운 자신의 모습에 취해 죄인을 벌하는 것은 아닌가? 악을 처벌함으로써 악의 반대편에 서있는 선이 되고자 하는 그런 단순한 심리 때문은 아닌가?


드라마를 보는 내내, 악을 처벌함으로써 또다시 악이 발생하는 끝없는 악의 연대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을 증오하는 마음을 도구로 삼아, 또 다른 사람들을 악의 편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들. 정의를 훼손하면서도 끝까지 정의로운 사람임을 자처하는 이들. <지옥>은 제목 그대로, 정말 처참한 지옥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곳에 정의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만 존재했다. 6부작이라는 짧은 구성이었지만, 그 자체로 지옥을 맛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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