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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미니형 Jul 24. 2023

퇴사


2023년 6월 17일, 나는 퇴사했다.




아무 예정없는 자진 퇴사는 처음이었다. 

회사에 있는 스무 명 남짓되는 동료들과 인사하며, 조용히 건물 밖을 나왔다. 한 달 전의 일이지만 꽤 오래된 듯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기억나는 건 건물을 나오자마자 유난히 햇살이 밝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하는 일은 IT 서비스 기획자였다. 조직의 목표를 정하며 그에 해당되는 프로덕트(Web Service)를 기획하며 일정을 짜고, 진행까지 맡는 일이었다. 고작 5년 간 IT 업계에 몸을 담았지만 꽤나 이 일을 사랑하고, 나름 커리어를 잘 쌓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사의 방향성과 조직문화의 공감이 형성되지 않으면서 번아웃이 오고, 새로운 직장에서의 좋은 연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왕복 3시간의 혼잡한 출퇴근과 주 70시간이라는 근무시간도 퇴사에 한 몫을 했던 건 틀림없다. 아주 미약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퇴사했다.


건강이 너무 좋지 못했다.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있다가 퇴근하면 뻗기 바빴고, 일어나면 헐레벌떡 출근해서 일주일을 반복하는 게 다였다. 원체 튼튼했던 몸은 잔병치레를 했고,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속이 더부룩했다. 퇴근 후 무거운 몸뚱아리로 헬스장에 가봤지만 머리가 심각하게 아프고 걸어다니면서도 졸렸다. 이대론 무리라고 생각했고, 주말의 모든 시간을 체력 회복에 신경썼다. 


성장에 필요한 동기부여가 부족했다. 직업 상 여러 주제를 담은 뉴스레터와 트렌디한 아티클들, 직무 관련 된 서적을 자주 보고 같은 산업군에서 일하는 여러 직군와 독서모임과 저녁식사 등 네트워킹을 자주 해오던 차였다. 이를 통해 성장에 필요한 거름을 놓을 수 있었지만, 절대적으로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였다.


결국 체력과 함께 길을 잃었다. 무엇을 위해 일을 해야할지, 인생의 방향과 철학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체력이 부족하니 명확하게 생각정리가 되지 않았고, 말을 구조화가 빨리빨리 이루어지지 않아 전달력이 떨어졌다. 이는 곧 업무 능력의 저하를 불러왔다.




퇴사를 결심하고 해보고 싶은 건"잘 쉬기"였다.




뜨거운 여름의 초입에 나는 퇴사를 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해야 했다. 이 모든 건 압축적으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개월 안에 이루어졌다. 여전히 나는 배울 것이 많다고 느낀 시간들이었다. 부모님께는 알리지 않았다.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기에도 아쉬운 나이인지라 괜히 신경쓰이는 일들을 만들어드리고 싶지 않았다. 일단, 일주일 간 심하게 앓았던 후두염을 치료하면서 보고 싶었던 영화와 드라마들을 몰아봤고, 읽지 못했던 책들을 찬찬히 읽었다. 그리고 운동을 시작했다. 



자상함도 체력에서 나온다. 이 말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침마다 러닝을 하고 헬스장에 다니면서 근력을 기르고, 킥복싱을 하게 되면서 찾아온 변화는 말할 수 없다. 예민한 성격은 조금씩 무뎌져갔고, 인내력과 다정함이 수치적으로 느는 것이 느껴졌다. 꼭 게임캐릭터처럼 체력을 레벨업하는 것 같았다. 쉬는 기간 동안에는 커리어의 넥스트 스텝을 위해 운동과 함께 인문학, 정서적 교양을 쌓으면서 정신적 육체적 체력을 기르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퇴사 후 한 달이 지났다.




인생의 미션을 찾았고, 집나간 체력을 찾았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다. 이것들이 고작 한 달만에 벌어진 일이다. 물론 하루종일 잠만 잘 때도 있었고, 숙취로 힘들어서 다음 날 해야할 일을 못할 때도 있었다. 해보고 싶었던 경비행기를 몰아보고, 평생 안하겠다던 킥복싱을 배우고 있다. 요즘 깨달은 점은 24시간은 생각보다 길다는 것이다. 일에만 몰두할 때는 일주일이 부족했는데, 오롯이 내면의 세계를 가꾸고 여러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니 내 직업, 내 커리어, 내 세계관이 이렇게 좁았구나, 그 동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나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축적된 긍정적인 에너지를 브런치로 발산해보고 싶다. 물론 이런 사소한 글들이 누군가에게 닿는다고 하면 그 또한 글을 쓰는데 훌륭한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교관님에 잠깐 배워서 직접 조종한 경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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