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아니 5년 전의 일이다. 기숙사에서 새로 칠한 페인트 때문인지, 매주 2번 셔틀을 타고 갔던 수영장의 물 때문인지, 아니면 무좀에 걸린 룸메이트와 같이 썼던 발수건 때문인지, 피부가 뒤집어졌다. 처음에는 손에 조그만 물집이 잡히고 팔과 다리에 100원짜리 동전 크기의 빨간 반점이 올라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고2 겨울방학이 끝나기 1주 전, 나는 기숙사에서 나와 병원을 찾았다. 통원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입원 수속을 밟았다.
가려움이 심해지면 따가움이 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에는 엄지손가락만한 물집이 잡혔다. 피부는 염증의 지도에 다름 아니었다. 하루에 한 번, 식염수로 온 몸을 닦고 스테로이드 연고와 로션을 발랐다. 손에 잡힌 물집은 칼과 가위로 쨌다. 구멍으로 누런 점액이 흘러나왔다. 몸이 전혀 나아지지도 않았는데, 3월 2일이 지나갔다.
대학 입시로 수시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3월의 전반부를 기약 없이 흘려보내는 것만큼 절망적인 일은 없었다. 언제 상태가 호전되어 기숙사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때때로 학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수행평가 발표 주제를 정해야 한다는 사회문화 선생님의 전화나, 수업에 왜 들어오지 않냐는 영어 선생님의 전화, 그런것들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안하거나 두려운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때의 내가 아무런 감정적 동요도 느끼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3월의 마지막 주에 몸상태가 호전되어 퇴원수속을 밟고 기숙사로 돌아가 어느 학기보다 가장 좋은 성적을 받고, 대학 입시에 성공했다는 해피 엔딩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몸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때의 마음은, 마음의 의지는, 마음의 평형 상태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마음은 몸에 영향을 주고, 그 반대로 몸 또한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과 몸이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 같다는 직관이다. 마음이 사유라는 속성을, 몸이 연장(extension)이라는 속성을 가진다고 할 때, 속성이 전혀 다른 둘, 다시 말해 질적으로 전혀 다른 둘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걸까? 속성이 같은 것끼리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만, 속성이 다른 것끼리는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으므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다. 신이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진 둘을 이어놓았다는 대답, 마음은 몸의 일부인 두뇌 상태에 다름 아니라는 대답, 그리고 마음도 몸도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답. 어느 것을 택하던 포기할 수 없는 약점이 생기고, 택하지 못한 다른 길에서 얻을 수 없었던 장점 또한 생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심신 문제, 몸과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이론들을 검토하면 검토할수록, 이론들의 설득력이 점점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론들에서 내가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론들의 원칙은 너무나 단순한데, 그에 비해 마음과 몸의 움직임은 날카롭고, 섬세하며, 때로는 그것의 주인조차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역동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론들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혹은 절망에 빠지는 순간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때의 마음, 병상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지만 아무런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았던 그 때의 마음이란 무엇이었을까. 정말 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몸에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연한 마음의 의지 덕에 몸을 무시할 수 있었던 걸까. 혹은 어떤 이론과 가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었을까. 무지에 대한 기억은 때때로 지에 대한 기억보다 수명이 길다.
Artist 'PJ' with Gallery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