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까? 부분이 물리적인 개념이라면, 그리고 마음이 몸과 다른 성격의 것이라면, 마음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우리는 실생활에서 마음을 부분으로 나누고, 때로는 그러한 부분이 마음의 전체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마음에는 지각이 있고, 기억이 있고, 추론이 있으며, 또한 믿음이 있다. 지각은 기억이 아니고, 추론은 믿음이 아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가 몸의 여러 부분을 분리하고 해부할 수 있듯이, 마음 또한 몸과 다르지 않아서 여러 부분을 분리하고 해부할 수 있는 걸까?
확실한 것은 마음은 마음이라는 것, 하나뿐이다.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마음에서 말이 나오고, 행동이 나온다.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자신처럼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 뒤에,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정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가진 마음이 나의 마음과 정확히 똑같은 모양의 것일까?
때때로 사람들은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에 이입한다. 주인공의 감정을 느끼고, 주인공의 생각에 공감하고, 주인공의 고난과 역경을 안타까워하고, 주인공의 부활에 환호한다. 주인공은 소설과 영화의 중심이다. 사람들은 주인공에 이입함으로써 주인공, 그리고 주인공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세상의 중심에 선다. 이입이란 어쩌면 세상의 중심에 서고 싶은 욕망일지도 모른다.
두 개의 마음이 겹쳐지는 사례를 보면, 마음에는 분명 모양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마음이 늘 하나로 겹치는 것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존경, 경멸, 숭배, 혐오와 같은 단어들은 타자를 자신 이상의 것으로 치켜세우기도 하고, 타자를 자신의 발아래에 있는 것으로 격하하기도 한다. 그 중 경멸과 혐오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자.
경멸과 혐오는 마음에 여집합이 있다고 주장한다. 경멸과 혐오의 주체는 자신의 마음과 다른 마음을 여집합으로 규정하고는, 그러한 여집합이 악한 것, 따라서 경멸하고 혐오해야 마땅한 것이라고 말한다. 경계가 해체되어 ‘A’와 ‘not A’로만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없는 사회에서 경멸과 혐오는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를 중심으로 타자를 규정하고는, 그러한 타자를 배척한다. 타자를 악으로 만든다. 자기와 타자 사이에 무無경계란 없다.
그러나 정말 마음이 그 자체와 그 자체가 아닌 것, 완전히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있는 것일까? 경멸과 혐오가 제시하는 벤다이어그램 도면 여럿을 살펴본다면 그러한 이분법이 그들의 주장대로 당연한 것, 필연적인 것, 혹은 당위적인 것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경멸과 혐오의 벤다이어그램이 여럿이라는 사실은 마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며 따라서 마음을 단순하게 ‘A’와 ‘not A’로 나눌 수 없음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똑같은 ‘-주의’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으며, 특정한 ‘-주의’를 가지고 살아가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무지몽매한 사람이라는 ‘-주의’의 주장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같지 않기에 주장의 힘을 잃는다.
모든 ‘-주의’가 악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주의’를 갖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의’는 때때로 사회적인 구조를 포착하는 데 도움을 주고, 집단적인 행동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집단적 힘을 등에 업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고 독단적으로 판단하려는 일부 움직임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몰이해에 다름 아니다. 마음이 있으면, 마음의 여집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있으면, 마음의 교집합 또한 있다. 교집합을 볼 수 없는 사람은 눈으로 흑과 백, 두 가지 색깔만을 볼 뿐이다.
Artist 'PJ' with Gallery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