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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MIND Mar 15. 2022

선 넘어 선

빨간 선, 노란 선, 검은 선

<땅따먹기>


 어릴 적 놀이터 흙바닥에 선들을 긋고, 돌을 던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놀이가 있었다. 사방치기, 혹은 흔히들 ‘땅따먹기’ 라고 불렀다. 선들로 나눠진 구역에 하나씩 돌을 던지고, 돌이 떨어진 구역을 피해 깽깽이로 간다.

추억을 회상하다가 다시 내가 서있는 바닥을 보면, 너무 많아진 선들에 앞으로 나아가기도 벅차다. 집을 나서 바로 마주친 횡단보도, 그리고 딱 맞춰 지킨 출근시간, 덧붙여 내가 스스로 정한 ‘매일 책 한권 읽기’ 등. 나라가 만든 선, 다른 사람들이 지키는 선, 그리고 내가 그은 선까지, 수많은 선들 사이에 내 자리는 점점 비좁아져 간다.


 비좁아진 내 자유에 위축되고, 이젠 어떤 선은 넘어도 되고 어떤 선은 넘지 말아야 할지 수없이 선택하다가 판단력은 흐려진다. 이 선, 저 선의 색깔이 구분되지 않다가 결국 선택을 포기하고 주저앉는다. 선을 보길 피하고 결국 눈을 감아 어둠 속으로 피해본다.


 패닉이다.


<선 넘어 선>


 학창시절부터 9등급에서 1등급으로 나눠지는 8개의 선들로 학업수준을 평가받으며 살아온 우리는 대졸과 고졸로 먼저 나뉘고, 인서울과 지방으로 나뉘고 다시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나눈다. 패닉에서 벗어나 빼곡한 선들을 잊고 싶어 잠시 누워 눈을 감는다. 선 하나 없는 유일한 공간. 어릴 적 그리도 무서웠던 까만 밤이 왜 지금은 위안이 될까.


<선을 배우는 사람>


 법이란 것도 하나의 선이고 기준이다. 이런 선들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는 한 학생으로서 우리 사회의 선, 그리고 우리의 선들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우릴 옥죄고 가로막는 것처럼 느껴지는 선들을 하나하나 풀어헤치다 보면,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조금씩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빨간 선, 법>


민법 제103조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


형법 제250조 2항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선이면서, 가장 돋보이는 선인 ‘법’이다. 마치 빨간 선처럼 절대 넘지 말아야할 존재이고, 지키지 않는다면 곧바로 대가가 따른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안전을 지켜주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최소한의 위생을 보장하며, 집에서 누군가의 침입 없이 곤히 잘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모두 ‘법’이다. 법은 개개인인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원으로 둘러쳐진 빨간 선이다. 이 선 안에 있기에, 우리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불안 없이 지낼 수 있다. 만일 누군가 이 빨간 선을 넘으려 한다면 당연히 말려야 할 것이다. 넘어선다면, 그 순간부터 믿음은 깨지고 그는 빨간 선의 외지인이 된다.


 법은 크게 2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헌법, 민법, 그리고 형법 등과 같이 뒤에 ‘법’이 붙는 것들과 ‘시행령’, ‘시행규칙’ 등의 령, 규칙이 있다. 법이 붙는 것은 국회에서 만든 법이다.


 그리고 령, 규칙이 붙는 것은 대통령이나 주관부서에서 세부적으로 만든 법이다. 국회에서 법을 만들 때, 사회의 디테일한 모든 사항을 다 감안할 수 없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사회 상황에 발빠르게 대처하기엔, 국회는 적합하지 않다. 국회의원들이 매일 모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합의가 곧바로 도출되는 것도 아니기에 국회는 신속한 대응을 못 한다. 그래서 이런 단점을 인지하고, 법에 ‘대통령령으로 정한다.’와 같은 단서를 남겨두어 대통령이나 주관부서가 어느정도 권한을 갖고 법의 부분을 정하게 한다.


 대통령령을 예를 들자면,


중대재해처벌법 제 2조 제 2호 다목

‘동일한 유해요인으로 급성중독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직업성 질병자가 1년 이내에 3명 이상 발생’

이라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으로 ‘직업성 질병자’에 어떤 질병이 있는지 대통령이 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래가 위임 받아 정한 대통령령이다.


■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별표 1]


직업성 질병(제2조 관련)


1. 염화비닐ㆍ유기주석ㆍ메틸브로마이드(bromomethane)ㆍ일산화탄소에 노출되어 발생한 중추신경계장해 등의 급성중독

2. 납이나 그 화합물(유기납은 제외한다)에 노출되어 발생한 납 창백(蒼白), 복부 산통(産痛), 관절통 등의 급성중독

…….

 

 위와 같이 대통령령도, 시행규칙 등 ‘법’이 들어가지 않은 항목이라도 법이고 효력이 있기에 령, 규칙이라고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노란 선, 규칙>


 오전 8시 30분, 종이 울리자마자 교문이 닫히고 앞에 지각생들이 울상으로 늘어선다. 선생님은 규칙은 규칙이라며 벌점표를 나눠 주신다. 오후 12시, 점심 종이 울리자마자 학생들이 급식소를 향해 달려간다. 결국 줄을 서서 선착순으로 밥을 받는다. 가끔 줄에 끼어드는 학생들은 선생님께 제지당하고, 다른 학생들의 눈총을 받는다. 그것이 우리의 규칙이었다. 정상적인 수업과 급식소의 질서를 위해 규칙은 필요했다. 회사나, 동아리나, 어떤 모임이건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이 모임을 유지하는 구심점이 된다. 그렇지만 이 선을 넘는다고 해서 인생의 걸림돌이 될 정도로 문제되진 않는다. 모임 내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긴 해도, 평생의 이력으로 남아 차후의 취업이나 사회생활에 영향을 끼치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노란 선’, 규칙은 모임의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지키기 위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그 노란 선이 개인의 사생활을 옥죄고 신체 및 정신건강을 힘들게 한다면 그 선을 무시해야 하는 순간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규칙이라는 노란 선은 서로가 부딪히지 않기 위해 중간에 긋는 선이지, 나를 쥐어짜는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검은 선>


 검은 선, 너무나도 흔한 선이다. 남들에게도 흔하게 그어주고, 나 자신에게도 매일 하나씩은 그어준다. ‘적어도 대학은 가야지.’, ‘공무원 되려면 이정도는 해야지.’, ‘이정도 야근은 누구나 하는 거야.’, ‘이 나이에 결혼은 해야지.’ 등등. 흔히들 목표라고 하거나, 최소한의 조건이라고도 한다.


 어릴 적에는 어른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뿌듯하고 어깨가 으쓱하게 만들었다. ‘다음 시험에선 1등해야지?’, ‘00이 서울대 가겠네~’ 하지만 커갈수록 기대는 무거운 짐이 되고, 머리 위에는 충족해야 할 수많은 기준선들로 빼곡했다. 그리고 이젠 그 선들은 희망의 선이 아닌 ‘의무’의 선이 되었다. 머리 위에 빼곡한 선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을 한다.


 ‘이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냐? 약하게 굴지 마.’


 그 검은 선들에 하늘이 가려지고, 빛 하나 안 드는 내 땅 위에 기쁨이 피어날 리 없었다. 그저 묵묵히 저 위의 선들에 닿기 위해 계단을 빚을 뿐이다. 노동은 값지다. 그러나 의미를 잊은 노동은 수고로울 뿐이다.


<검은 선 너머의 빛>


 검은 선들에 질식해가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가 긋는 선엔 사실 빨간 선인 법처럼 무조건 따라야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노란 선인 규칙처럼 남들과 잘 지내기 위해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꼭 해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검은 선에 안 닿아도 좋다. 그래도 당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늘의 빛을 받아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이다.


 남들이 내게 그어준 기준 선들은 나의 펜을 빼앗아 그린 선이다. 나의 캔버스에 남이 선을 그었을 때, 그것이 만족스럽긴 어렵다. 당신이 좋아하는 선들로 캔버스를 채웠으면 좋겠다. 삐뚤삐뚤한 선이라도 좋다. 그 선들이 나중에 모여 밑바탕이 되고, 더 큰 그림을 그리면 되는 것이다. 남이 그어 놓은 선 따라, 남의 그림을 그리려 하지 말자. 당신의 그림은 그 자체로 유일하고 당신만의 아름다움을 이미 담고, 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결혼 안 해도 좋고, 대학 안가도 좋고, 대기업이 아니어도 좋다. 어설프게 원치 않는 검은 선들을 채워가다 보니 눈 아래에 다크써클만 채워간 사람보단, 자신만의 그림을 당당히 그린 초롱초롱한 눈빛의 당신이 더 빛난다.



<연필대신 지우개를 쥐길>

 검은 선의 또 다른 특징은, 꼭 따르지 않아도 되기에 ‘지워도 된다.’는 것이다.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이 쥐어 준 목표나, 혹은 자신이 어느 순간 가졌던 목표일지라도 무조건 지켜야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 특징인지 몰라도, 자신이 변덕부리는 모습을 남들에게 비치길 굉장히 꺼려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당신의 그림을 당신이 얼마든지 바꾸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얼마든지 그렸으면, 얼마든지 지우는 것도 당신 몫이지 남들이 신경 쓸 바는 아니다. 당신의 미술이고 당신의 삶이니까. 그러니 연필로 여기저기 그을려고만 하지 않아도 된다. 용기내 지워보자. 자국이 남아도 좋으니 지워보자. 그렇게 나를 옥죄던 사회의 기준, 나만의 기준을 하나씩 지우다 보면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 사이로 주변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완벽한 선은 없다>

 당신이 검은 선을 지워도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이유가 가장 크다. 이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선’은 없다는 것이다. 설령 빨간 선인 법일지라도, 만들 때부터 수없이 수정된다. 그리고 국회에서 의결된 이후일지라도, 몇 번의 걸쳐서 개정이 되어야 안정이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되면 또 바뀔 수도 있다.


 노란 선인 규칙도 시시때때로 바뀐다. 이전엔 모두가 동일하게 9시 출근과 6시 퇴근을 했지만, 이제는 자율적으로 출퇴근을 하고 재택근무를 하기도 한다. 학생들은 이제 학교에서 자유롭게 염색하고 파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당신의 검은 선, 기준이라 할지라도 바뀌지 않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당신이 바라지 않고, 맘에 들지 않는 선은 과감하게 지워도 된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선은 없다. 그 누군가가 완벽하다고 생각한 선이거나, 완벽하게 만들려고 그어가는 선이 있을 뿐이다.



 당신의 삶 앞에 놓인 검은 선 중에 완벽한 선은 없고, 그 선을 무조건 지켜야하는 이유도 없다면, 당신을 위한 선들을 다시 그어 가도 되지 않겠는가?

아래는 잭슨 폴록의 no.5 라는 작품이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No._5,_1948)

No.5 / Jackson Pollock


 내가 처음에 그림을 접했을 때, 그림의 어수선한 모습에 놀랐고, 두 번째로 가격에 놀랐다. 경매 낙찰가가 2200억원이라고 한다. 이런 낙서를 2200억에 사다니 정말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다, 다시 이 작품을 보니 다른 느낌을 받았다.


‘와...자유롭다. 나도 저렇게 자유롭고 싶다.’


 잭슨 폴록은 저 그림의 선 하나하나를 칠 때마다 긴 고민에 빠지고, 자신에게 영감이 떠오르면 그때서야 붓으로 길게 물감을 던졌다. 남들이 뭐라하건 신경 쓰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만의 그림, 자신만의 선을 긋고자 몰두했다. 그런 그의 자유로움, 고뇌, 그리고 그만의 색깔에 사람들이 매료된 것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상상하게 하는 그림이다.


 당신이 어떤 그림이라도 좋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될 수도 있고, 잭슨 폴록의 no.5가 될 수도 있다. 다만, 당신만의 기준, 당신만의 선들로 삶을 채워 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야 온전한 당신이고 그 당돌한 매력에 우리가 매료될 테니까.


 잭슨 폴록의 한 마디로 글을 마치겠다.


 “I am able to be more free and to have greater freedom and move about the canvas, with greater ease.”

 

“나는 더 자유로워질 수 있고, 편안함과 함께 도화지 위에서 더 위대한 자유와 춤선을 가진다.”




Artist DAN:D with Gallery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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