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흔한 도둑 클라쓰
서울에서 운전하면서 교통사고 한 번도 안 겪어본 사람?
이라는 질문에 몇 명이나 손을 들까.
미국 대도시 아파트에 살면서 도둑 한 번도 안 맞아본 사람??
이라는 질문에 손 드는 사람 비율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다. 미국에서 도둑을 맞는 건 꽤나 흔한 일일 것이다.
안 겪는 사람도 많지만 겪는 사람도 많다.
'어휴. 사람 안다쳐 다행이네.' 할 일이지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니깐 그 일이 내게 닥쳤을 때
내가 재수가 더럽게 없어서 그런 일을 당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마치, 언젠가는 겪을 일을 지금 미리 겪은 것 뿐이라고,
나는 의외로 차분하게 자신을 토닥일 수 있었다.
3주간의 겨울방학, 지루했던 코로나 시대의 집콕이 끝나고 오랜만에 아이가 학교에 간 날이었다. 아이 하교시간에 맞추어 잠깐 외출을 한 사이였다.
집을 비운 시간은 길어야 30분.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는데, 집쪽으로 뛰어들어간 둘째녀석이 보이질 않는다.
뭔가 이상해서 들어가보니 아이는 이미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문을 어떻게 열었어?
내가 문을 안잠그고 갔었나?
아이를 뒤따라 들어가보니 거실의 서랍장이 완전히 뒤집어져있다.
믿기 어렵지만, 누군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집을 뒤진 것이 분명했다.
입은 떡 벌린 채, 눈으로는 노트북과 카메라를 스캔했는데 책상 두고 간, 조금 전까지 사용하던 노트북이 없어졌다.
젠장. 큰일이다. 당장 어떡하지.
없어진 노트북을 보고서야 도둑이 든 것을 실감했다. 바닥에 한국 돈 5만원권이 뒹굴고, 서랍속에서 빠져나온 흰 봉투들에선 아이 레슨비를 위해 넣어둔 돈 20불짜리가 든 돈봉투들이 줄줄이 발견되었다. 봉투 속까지 뒤질 여유는 없었나보다. 그게 뭐라고 이 와중에 운이 좋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소파위의 비닐봉지 속에 차곡차곡 넣어둔 노트북 네 대와 충전선 네 개를 발견했다. 쓰레기봉지를 바닥에 쓰레기를 엎은 후, 그 봉지에다 노트북을 담아놓은 모양이다. 실컷 담아놓고 왜 안가져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때부터 무섭다는 생각보단 그 와중에 운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과 경찰에게 연락한 후, 집안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시간동안 벌인 일 치곤 집을 뒤진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거실의 입 열린 서랍장은 모두 텅텅 비어 있었고, 바닥엔 모든 물건들이 쌓여져 산더미를 이루었다. 사소한 상품권이나 현금은 미처 발견을 하지 못했는지 남아있었지만 남편의 퇴직연금으로 받은 엔화가 들어있던 두툼한 봉투와 남편의 지갑은 확실하게 털렸다.
안방의 꽉 찬 책장은 모두 바닥으로 쏟겨져 있었다. 특히나 지퍼가 잠겨졌던 성경책 세 권은 지퍼까지 열어 꼼꼼히 뒤진 듯 했다. 안방에 연결된 옷방은 옷이 아이 키만큼 높이 쌓여있었다. 모든 잡동사니와 짐들이 들어차 있는지라 그 안에 중요한 것도 있으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들어갈 틈조차 없었는데 어떻게 바닥으로 옷을 쌓아두고 뒤지고, 밖으로 나왔을지 궁금할 정도였다.
안방과 연결된 파우더룸이자 욕실은 가장 짐이 적은 곳이었지만 알뜰하게 털어간 곳이었다. 화장품 사이사이 공간까지 뒤진 듯 화장품은 바닥에 쏟아져있었고, 악세서리함도 꼼꼼히 뒤진 듯 결혼예물을 비롯한 알짜배기 귀금속들을 가져갔다. 악세서리들 가운데서 마치 금만 빨아당기는 자석이라도 갖고 다니는 듯, 금으로 된 것만 쏙쏙 뽑아 잘도 찾아갔다. 14k는 몇 개 빠뜨렸지만 18k는 귀신같이 가져갔다. 18k금인줄 알았던 남편의 목걸이는 분명히 보고도 안가져간 걸 보고서, 금인줄 알았던 이건 아니었나보다 하고 피식 웃었다. 화장실 구석에 떨어진 귀걸이 한쪽은 차마 가져가질 못했다. 이젠 짝이 없어 착용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할 내 반쪽짜리 결혼 예물은 그대로 내 쥬얼리함에 들어있다. 다음번에 또 도둑이 온다면, 그 때 가져갈 건 이것 하나뿐이리라.
딸은 다소 신이 났다. "엄마! 내 지갑이 여기 눈에 보이는 데 있었거든? 근데 이 안에 아마존 기프트 카드도 그대로 남아있어!!! 할머니가 준 돈도 그대로야!! 도둑들 바보 아니야? 뻔히 보이는데도 왜 안가져갔지?" 아들은 구석구석 삐져나온 짐들 사이에서 여지껏 발견하지 못했던 장난감들을 발견하고선 구석에서 혼자만의 놀이시간을 갖느라 여념이 없었다.
도둑은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나가는 것을 확인했으며, 어떻게 현관문을 따고 들어왔으며, 언제 베란다를 통해 도주했을까. 그들의 기술력보단 이렇게 송곳 하나에 열리는 허술한 현관문이 경이로웠지만, 미국이란 나라가 그런 곳이다. 좀도둑들은 강도보단 가벼운 범죄로, 빈집이나 빈차의 물건을 털어간다. 보통은 유리창을 깨거나 열린 유리창으로 침입하는데 사람이 없는 집이 확실한가에 주안점을 두는 듯 하다. 총기소지자들이 많은 이곳에서, 총 맞아 죽을 일만 없게 하자, 경찰이 출동하기 전에 짧고 가볍게 털자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 아닐까.
도둑들은 내가 나가는 것을 유심히 본 것이 틀림없다. 금방 돌아올듯한 차림으로 슬리퍼 질질 끌고 나갔지만, 이렇게 방심하고 잠깐 나가는 사람들이야 말로 그들의 타겟이 되기 쉬울 것 같다. 좀도둑의 빈집털이 목표시간은 보통 5분이내라고 한다. 집의 방범 시스템이든 보안카메라로 911에 연락이 갈 경우 경찰 출동 시간이 보통 5분내외라는 데에 착안했으리라. 5분동안, 꼼꼼하게 털기보단 귀중품이나 값나가는 전자제품들을 대충 털어나간다고 한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우리집에 들어온 도둑은 처음에는 창문을 열려고 애를 애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창문틀을 휘게 하는 것 외에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고, 결국 정면승부를 보기로 한 것 같다. 현관문틈 사이에 송곳같은 것을 집어넣어 현관문을 열었고, 어렵지 않게 성공한 것이 아닐까. 방범을 위한 보조장치를 설치했는데 믿을 게 못되었다.
911에 신고를 한 후 경찰관은 10분정도만에 도착했다. (후에 주변에서 듣게 된 이야기지만, 엄청 빨리 온 편이란다.) 경찰이 왔으니 지문채취, 족적채취 등을 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마피아나 마약상을 잡는 일도 아닌데, 미국 경찰은 이런 좀도둑을 잡데 열의가 있을 리는 없다. 이미 도둑이 현장을 벗어났다면 경찰이 하는 주된 업무는, 분실품 목록 작성을 하는 일. 혹시나 그것들이 거래될 때 추적해 잡는 일 정도였다. 보험회사에 분실물을 신고할 때 경찰관에게 보고한 분실품 목록과 일치하도록 작성을 꼼꼼하게 잘 해야한다고 했다. 혹시나 방범카메라를 설치해서 도둑이 집에들어온 걸 알았을때라면 911로 신고하면 5분안에 사이렌을 켜고 달려와 도둑을 쫓아내준다고 했다.
쫓아준다고? 잡아주는 게 아니라?
나중에 고모부에게 들어 안 사실이지만 이런 좀도둑들은 체포되어도 판사들이 풀어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경찰도 애써 몸을 던져가면서까지 잡지 않는 것일테다. 미국인 고모부도 여러번 도둑을 겪었기에 다시는 휴스턴 도심에 살지 않는다며, 휴스턴 경찰을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럼 고모부가 살고계시는 여기(위성도시)는 안전한 편인가요?"
"이 동네는 꽤 안전해. 총기소지 면허를 가진 사람의 비율이 엄청 높거든. 그만큼 총을 갖고 있는 사람도 많고. 도둑이 함부로 들어올 생각을 못하지."
일반인들도 가정에 총을 많이 소지했다는 것이 한국사람인 나에겐 '위험'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는데
미국인 고모부의 뜻밖의 대답에 조금 놀랐다.
"총기를 집에 갖고 있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지." 라고 덧붙이셨다.
도둑이 지나간 후, 보안 카메라도 하나 구입했다. 예전부터 우리집 쓰레기통에 먹다 남은 커피잔을 몰래 버리는 사람이 있어 가짜카메라라도 설치하고 싶었는데 이참에 잘 되었다 싶어 아파트에 문의를 했다. '이웃 주민의 프라이버시 문제도 있을텐데 창 밖을 촬영하도록 설치해도 되나?"고 문의하니 집 안에 설치하는 거라면 어디에 어떻게 설치하든 내 자유라는 답변을 받았다. 우리집에 방문한 경찰은 카메라로 도둑을 잡는 일은 어렵지만, 집에 사람이 없을 때 핸드폰에 오는 알림을 보고 911에 바로 신고를 하면 경찰이 바로 달려오니 도둑이 훔치던 도중에라도 달아나기때문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다고 했다. 물론 내 기대는 굳이 내가 911 신고를 할 필요 없이, 우리집 현관으로 다가오는 순간 도둑이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발견하고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