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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단조 Apr 10. 2021

눈이 오자, 온 도시가 마비되었다.

미국생활 재난기 3

휴스턴에는 두 계절이 존재한다. 

여름과 비(非)여름


휴스턴은 미국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도시이니만큼 동남아 날씨와 비슷하게 후텁지근한 날씨가 연중 절반이상을 차지한다. 그래서 일년의 절반 이상은 하루종일 에어컨을 틀어놓고 살 정도이다. 그렇다고 겨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일년에 며칠정도는 가볍게 패딩을 입을 수 있는 날이 주어진다. 단 며칠이므로, 이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년에 일주일 입으려고 구비해둔 겨울옷을 일년내내 못입을 일이 생긴다. 추워지면 최대한 열심히 꺼내 입는게 인지상정이다. 


그런 휴스턴에, 눈 예보가 있었다. 


휴스턴에 눈이라니! 


영하 1-2도 정도에서 눈같은 것이 내리다가 비로 녹아내리는 걸 몇년 전에 목격한 적이 있긴 했다. 그 눈 비슷한 것 때문에 도로는 얼었고, 이틀동안 학교가 휴교를 하기까지 했는데 이번엔 상상 할 수 없는 숫자인 영하 8도에 눈까지 겹친다니. 정말 믿기지 않을만큼 기뻤다. 

학교나 직장이 문을 닫는건 당연할 것이었지만, 눈에 고픈 휴스토니안들은 그저 흥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40년만에 몰아닥친 강추위가 얼마나 휴스턴에 치명적일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하얀 눈이 도시를 예쁘게 뒤덮은 그림같은 풍경만 상상할 뿐이었다. 


예보를 보니, 눈이 금세 그칠 것 같아서 해 뜨기 전 6시반부터 눈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이불을 들췄다. 흥분한 아이들은 학교가라고 깨울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으로, 용수철처럼 침대 밖으로 뛰어나와 옷을 집고 뛰어나갔다. 옷장 한구석을 차지하는 일년에 한 번 입을까말까한 두툼한 패딩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 날이다. 


아이들이 있는 집만 신난 게 아니었다. 30~60대로 구성된 미국지인들과의 단체문자방에서는 스노우엔젤을 만들거나 눈놀이, 눈밭에서 신나게 노는 인증샷이 오가며 기쁨을 나누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 개의 문자를 시작으로 분위기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우리집 전기가 나갔어. 너네는?"  (Our power is not. Anyone else?)


그 후로, 하나 둘씩 

"우리도"

"나도"

"지금 막 나갔어."


정오가 지나고 오후가 되자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전기가 나간 집은 점점 더 늘어났다. 많은 호텔방들은 이미 꽉 찼거나, 정전되어 영업이 불가능했다. 휴스턴의 40%밖에 전력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불행중 다행히도, 우리집은 그 40%에 해당해 전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자, 집은 급속도로 추워졌다고 했다. 방한에 전혀 대책이 없는 휴스턴의 집들은 아무리 물을 틀어놓아도 마당에서 수도관이 동파되어 터졌고, 세탁기나 화재용 스프링클러 등 물을 계속 틀어놓을 수 없는 부분도 얼어서 터지는 일이 속출했다. 집에 열기가 하나도 없이 추워지자 집안의 수도들까지 동파되었다고 했다. 영하의 온도를 고려하지 않고 지어진 집들은 히터마저 꺼지자 대책없이 고통받고 있었다. 


사람들은 전기가 들어오거나 물이 나오는 집들로 이 집 저 집 옮겨다니고 있었다. 이 집도, 저 집도 전기가 끊겨 결국 갈 데 없어진 이들은 차에 시동을 틀어놓고 히터를 켜고 있기도 했다지만 오래 버텼을 리 없다. 아이들도 있는데 촛불에 의지해 거실에서 모두 모여 캠핑온 듯 오붓하게 잠을 잤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중에야 좋은 추억으로 남겠지만 당장은 얼마나 춥고 처량했을지 상상해보면 가슴이 짠했다. 가스 벽난로가 있는 집은 그럭저럭 도움을 받았으나 머리가 너무 아파 오래 틀 수도, 벽난로 바로 앞만 따뜻해서 다른 데로 갈 수도 없었다고 했다. 직접 장작을 때야 하는 벽난로의 경우, 장작을 구할 수 없으니 아이 장난감이나 폐가구 등 태울 수 있는 나무는 모조리 태우기도 했다고 한다. 


홈디포 등 철물점들은 파이프 부속품들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계산줄에서만 몇시간씩 기다려야 했다고 했고, 다음날부턴 죄다 품절이라 구할 수도 없다고 했다. 구할 수 없는 건 파이프 부속품뿐이 아니었다. 배관기술자들의 전화기에 불이 나, 스무군데, 서른군데씩 전화를 돌려보아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결국 이 비정상적인 상태는 일주일이상 갔으며 학교는 2주간 휴교되었다. 정전된 집들이 그러했듯, 정전이 된 마트들은 우유 등 냉장/냉동보관 했던 식품을 모두 폐기해야 했다. 마트의 식료품들 뿐일까. 접종예정이던 냉동보관 코비드 백신의 공급에도 차질이 생겼고, 그 외의 다른 백신들도 모두 동이 나 몇 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아이의 정기검진날 알게 되었다. 그렇게 강추위에 찾아온 정전은 3일을 계속되었고, 엄청난 상흔을 남겼다. 


미국 북부에 사는 사람들은 이정도 추위에 난리법썩을 떠는 텍사스 사람들에게 코웃음을 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뉴욕은 아무리 추워도 큰 일이 일어나지 않듯, 휴스턴에선 도로가 녹아내릴 정도로 더워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추울 경우는 흔치도 않고 예상도 못했던 경우인지라 이런 말도 안되는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번 전력부족난은 겨울 추위를 대비해 전력을 충분히 준비해두지 않은데다, 강추위로 천연가스 배관이 얼어버려 시작된 일이라고 한다. 전기나 휘발유라면 남부럽지 않게 많이 갖고 있는 텍사스이지만, 행정가들이 충분히 대비하고 막을 수 있는 일이었는데 어이없이 당하기만 했다. 


우리집처럼 단전도, 단수도 없었던 집은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돌아가며 고생을 했다. 이로 인해 감사했던 점이 있다면 하나는 웃프게도, 아직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집이 없어서, 무주택자라 감사. 둘은 일주일간 이 문제에 신경쓰느라 코로나는 하나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어 감사. 

결국 허리케인 하비 이후 4년만에, 또다시 중대 재난지역으로 선포된 텍사스.  

텍산들은 SNOVID-21을 이겨냈다는 전우애를 얻은 대신, 많은 것들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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