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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단조 Mar 16. 2021

미국 베이글녀에게 모멸감을 느꼈다.

인종차별인지 언어차별인지 모를 기분나쁨에 관하여

5학년인 딸아이의 요즘 관심사는 온통 다리에 가 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다리털에 있다. 

다리에 털이 자라는면 엄마 몰래 면도기로 다리털을 밀고, 또 밀고.... 

도대체 왜 엄마는 자기보다 털이 적은지, 친구 누구는 제모크림을 바른다는데 엄마는 그걸 왜 안사주는지....머릿속은 온통 다리털로 가득찬 것 같다. 언젠간 자연스럽게, 관심이 다른데로 넘어가겠지만 말이다. 


급격한 몸의 변화를 맞이하는 딸아이가 그러하듯 누구나 자기 레벨에 따라, 자기 눈에만 유독 보이는 게 있을 것이다. 나에겐 미국생활 첫 3년동안 영어가 그런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대화'를 하는 것인데 나는 대화보다는 내 '영어'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내가 영어못하는 게 왜 미안할 일인지 모르면서도 대화를 이어가다 말이 막히면 미안하다고 말했고, 대화의 흐름을 신경쓰긴 보단 방금 한 말 중 발음을 잘못한 것, 문법이 틀린 것을 바로잡기 바빴다. 집에 와서 오늘의 대화들을 복기하다가 그제서야 실수를 깨닫게 되면 한밤중 이불킥을 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20대때 호주, 캐나다와 미국을 여행한 적이 있었고, 한국에서도 북미권 원어민 교사들과 함께 일을 했기에 미국에 와서 미국인과 대화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일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히라가나만 겨우 알고 일본에 가서 살았던 시간은 고달픈 게 당연했지만 설마 미국에선 어려울 일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쓰는 영어와, 여행에서 쓰는 영어와, 현지인의 영어는 확연하게 달랐다. 영어는 어느정도 아는데 문화를 몰라서, 문맥을 몰라서 바보가 되는 일이 곧잘 생기곤 했다. 

그 첫 번째 해프닝은 미국의 어느 유명한 베이글집에서 일어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먹었던, 아인슈타인 베이글

미국에 도착한 지 두 달쯤 었을까. 

이제 막 킨더에 등록해서 ABC를 배우고 있는 여섯살 딸과 3달된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집 밖으론 잘 나가지 않던 시절이었다. 텍사스 사람들은 너나 나나 다 총기를 갖고 다닐 것 같은데 갓난쟁이 아기를 안고 나가는 것도 어쩐지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날, 용기를 내고싶어져 아이 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마트에 가는 길에 만난 베이글집을 보니 어쩐지 저기부터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코스트코에 파는 베이글이 이 집거였어? 하며, 매우 반가운 마음으로 차를 세우고 들어갔다. 


가슴에는 아기띠로 젖먹이 아기를 안고, 오른손엔 여섯살짜리 아이를 데리고서 들어간 베이글집은 근사하고 활기찬 분위기의 카페였다. 기분좋은 음악이 흥겹게 들리고, 부드러운 커피향이 났다. 점심을 먹는 손님들도 꽤 있었는데 오랜만에 해보는 외출에 괜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와 나는 진열된 베이글 세 개를 골라 주문을 하려고 했다. 


"뭘 도와드릴까?"


화려한 손톱장식에 화장을 한 그녀는 엄청나게 큰 키에 예쁜 얼굴의 소유자였다. 스포츠 선수같은 늘씬하고 덩치 좋은 20대로 보이는 흑인 여점원이었다. 


"포테이토 베이글이랑 시나몬, 커피랑...." 

내가 원하는 걸 미처 다 얘기하기도 전에 그녀가 큰 소리로 뭐라고 말을 했다.


"#@$*@()!@($!@"


무슨 말이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되물었다.


"Pardon?"


"@#(*$()!($#)!@$*"


두번째도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흑인 특유의 리듬이 있었는데 영어가 분명한데 난 왜 하나도 못알아듣는걸까.

음악소리는 왜 이렇게 큰거지? 괜스레 음악 탓을 해 보았다.  

이 여직원의 목소리는 또 왜 그렇게 큰지, 내가 겁먹기에 충분한 목소리였다. 


"Sorry?"


두 번을 못알아들었더니 그 직원은 나를 상대하길 포기한 듯, 코웃음을 취며 뒤를 돌아 동료 직원에게 말했다.

희안하게도, 그 말은 무슨 말인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얘 뭐가 없대서 없다고 말하는데 왤케 못알아듣냐?"


그녀는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내가 못알아듣겠다고 미안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으면 천천히 설명을 해 주면 될 것이지, 그걸로 손님 면전에서 뒷담화를 하다니? 를 시작으로

미국에서 간만에 용기내어 집밖으로 나온건데, 겪는 일이 고작 이거라니? 라는 자책에까지 빠졌다.

빨리 젖달라고 칭얼대는 둘째가 내 가슴에 안겨있고, 무슨 상황인지 몰라 당황하는 첫째가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내가 못알아들은 말은 별 건 아니었다.

내가 주문한 베이글이 품절이었고, 그 이름이 적혀있는 자리에 있는 건 다른 베이글이다. 그러니 다른 베이글로 주문하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할거냐는 그 직원의 말에 눈을 똑바로 째려보며 화가 난 채 혼자 얼굴을 불그락 푸르락하니

어떤 상황인지 궁금한 딸은 불안해서 계속 저 언니가 왜 빵은 빨리 안주냐고 묻는다.

이 상황에서 따지기 시작하면 과연 끝까지 멋있게 마무리 할 수 있을것인가를 생각해보다가 결국은 포기한다.


"그냥 그거 두 개 줘. 커피는 빼고."


계산을 하고 돌아서면서도 그 점원에 화가 나고, 어떻게 하지 못한 못난 내 자신에 화가 났다. 한 달 동안은 밥을 먹다가도 생각이 나 화가 났고, 아이 젖을 먹이다가도 화가 났다. 자다가도 화가 나 이불킥을 했다. 그때까지만해도 그건 명백한 인종차별이라 생각했다. 

한달쯤 혼자 화를 내다 보니 내 머릿속도 정리가 되었다. 친구에게도 덤덤히 경험을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때 영수증을 꺼내와 베이글 회사에 이메일을 썼다.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이런 일이 있었다. 

직원이 손님을 이렇게 손님을 무시해도 되느냐. 

언어차별이 아니라면 인종차별이 다름아니다. 

다시는 그 베이글 가게에 가고싶지 않을 뿐더러 근처도 지나가고 싶지 않다. 


본사에서도 사과 이메일이 왔고, 지점 매니저에게도 사과 이메일이 왔다. 


이것은 분명 직원 과실이고, 앞으로 직원관리를 어떻게 하겠다. 기프트카드(상품권)로라도 사과를 하고 싶으니 주소를 알려달라.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은 사과가 '돈'이라고 한다. 경제적으로 보상하는 것이 사과를 하는 방법이자 받는 방법이라고. 하지만 한국사람인 나는 내 주소를 가르쳐주고 기프트카드를 받고, 그 카드로 그 베이글을 또 사먹으러 가는 짓은 하고싶지 않았다. 


흥! 기프트 카드 받아봤자 소용없어. 나는 너네 가게 다시는 안갈거야. 


하고 치사한 답장을 보내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 후로 5년이 지났다. 그 후로도 서비스를 받기 위해 간 곳에서 이런 비슷한 일들이 몇 번 더 있었지만 처음처럼 상처를 받는 일은 없었다. 일본에서 공손한 점원의 대접만 받아보다가 미국으로 이사갔기에 처음의 그 온도차를 더 크게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나 아닌 그 누구에게나 소리를 질렀고,(나라마다 말하는 스타일이나 톤이 있듯, 소리를 크게 치며 이야기한다고 꼭 화내는 것은 아니었다.)  

나 아닌 그 누구에게도 비교적 공평하게 불친절했다. (불친절한건 목소리 톤보단 눈빛이나 말투로 와닿았다. 백인 할머니든 아시아인 아줌마든 공평하게 초등학생 아이를 가르치는 듯 명령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같은 인종의 고객들에게는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보였는데 이 고정관념은 5년째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대놓고 과격한 인종차별을 하는 건 아닌 경우가 훨씬 많았고, 그런 경험이 많아질수록 나는 익숙해져갔다. 비슷한 일이 생기면 차분하게 매니저를 부르라고 해서 이야기를 하거나, 직원의 이름을 물어보고 (일부러 두 번, 세 번 확인한다.) 잘 적어두었다가 본사에 이메일을 보내곤 했다. 파트타임 직원의 경우는 경고를 받거나 해고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운전면허 시험장이나 우체국 창구 직원들에겐 컴플레인도 큰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큰 기대 없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하루정도 기분이 나쁘면 그만일 뿐, 나 자신을 탓하거나 세상을 무서워하는 맘은 먹지 않기로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가끔 기대도 없던 곳에서 상식적으로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면 눈물마저 핑 돌 정도로 감동을 받기도 한다. 




이젠 그 베이글 집 앞을 지나가도 아무렇지도 않다. 인종차별이든, 언어차별이든, 보편적인 불친절이든, 의도적인 무시든, 5년간 대도시의 차가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나도 맷집이 조금 생겼나보다. 이젠 그 때의 그 불친절한 그 여자아이를 떠올리면 화가 나긴 커녕 안쓰러운 마음이다. 또한 남으로부터 나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지 못한 채 자책하며 스스로를 할퀸, 그 때의 나 자신이 떠올라 안쓰러울 뿐이다. 


이민 1세대로 살아가며 처음 몇 년간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은 필연적일지도 모르겠다. 언어때문에 내 나라에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한계를 자주 경험하고, 내가 범접할 수도, 동화될 수도 없는 문화앞에 주저앉기도 한다. 하지만 긴 하루를 보내며 떨어진 자존감은 집에 돌아와 다시 주워 탁탁 먼지 털고 다시 탄탄하게 장착하는 것이 이민생활의 필수 루틴이다. 

"누가 뭐라든!" 하는 맘으로 말이다.


이민 첫 3년동안의 화두는 오로지 '영어'였다면 지금의 화두는 '자존감'이 되었다. 

누구에게 무슨 일을 겪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굴러온 돌에게 서러운 일은 수시로 닥치지만, 내 영혼만은 누구도 해치지 못하게 지켜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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