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 총격사건 그 이후
2011년 11월. 일본에 이주한 후 두달만에 이삿짐이 도착하던 날의 일이다.
한국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벙어리로 두달을 지낸 터라, 오랜만에 만나는 한국사람들이 이삿짐보다도 더 반가웠다. 오랜만에 듣는 한국말도 너무 좋았고, 서로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시며 일하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붙잡고 식사라도 대접하면서 일본생활에 대해 특강이라도 청하고 싶을 정도였다.
성실하게 짐을 다 날라주시고, 이사를 마무리할 때즈음 슬쩍 여쭈어보았다.
"일본에 오신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전 한 10년은 넘었죠."
10년이라니.... 나는 고작 두 달 살고도 당장 돌아가고 싶은데. 10년을 어떻게 사신 걸까?
살다보면 또 이 곳에 적응하고 1년, 2년, 10년까지도 살 수 있게 되는걸까? 하는 희망어린 눈으로 아저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번에 저희 가족은 한국가는 티켓 끊었어요. 완전 귀국하려구요."
일본에 오래 사셨다기에 혹시 희망적인 말을 해주시진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던 나는 가슴이 탁 막혀버렸다. 이건 내가 기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저씨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참고, 또 참으며 잘 살았는데, 자리도 잘 잡았다 생각했는데 311대지진을 겪고나서는 도저히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다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완전히 바닥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하겠지만 아이가 어릴 때 한 해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하셨다. 아이랑 함께 살 곳은 아니다 싶으셨단다.
절망스런 내 표정을 보시고선, 그제야 아차 하시며, 이제 오신 분에게 괜한 얘길 했노라며 멋쩍어하셨다. 아저씨에게는 잘못이 없다. 돌아갈 마음에 잔뜩 부풀어있는 아저씨는, 너무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신 것 뿐이었으니까.
"잠깐 살기는 괜찮은 곳이에요! 지진만 없으면요. 대지진이 있기 전까지는,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살기 정말 괜찮았거든요."
곧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 너무 신난다는 듯, 아저씨는 경쾌한 미소로 잘 살라 하시며 돌아가셨다.
열흘 전 일어난 애틀랜타 총격 사건을 뉴스로 접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그 때 갑자기 10년전에 만난, 안전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시겠다던 도쿄의 이삿짐 아저씨가 떠올랐다. 아저씨는 한국에서 자리를 잘 잡으셨을까. 훨씬 안전한 곳이니까,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계실까.
어쩌다보니 그로부터 10년후, 나는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다. '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한국에서도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여기서는 명백한 비주류이지만, 그래도 내 나라에서 비주류가 되는 것보다 남의 나라에서 비주류가 되는 것이 덜 서럽다. 그래서. 괜찮다.
아니,
괜찮았다.
하지만 가끔, 좋은 점들은 하나도 눈에 보이지 않고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흔들리는 때가 생긴다. 요즘같은 때가 그렇다.
이번달, 애틀랜타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은 마사지샵, 스파 등에서 일하는 아시안 여성들을 상대로 자행되었다. 동양인 여섯명, 그 중에서도 한국인 여성 네 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경찰이나 언론은 '범인이 왜 그랬을까'에 초점을 맞출뿐, 어떤 생명이 꺼졌는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범인은 이전에 소셜미디어에도 중국혐오 관련 발언을 한 적이 있음에도 경찰은 이를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고, '성중독에 의한' 범죄라고 발표해버렸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잔혹한 인종차별의 역사가 있는 나라이니만큼, 미국이란 나라는 '인종차별'이나 '증오범죄'같은 것을 무척이나 엄중하게 다룬다. 그래서 일부 경찰들이나 언론들은 이런 사건을 그런 엄중한 범주에 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정신병자의 일탈정도로 다루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BLACK LIVES MATTER 으로 2020년이 떠들썩했지만, 한편으론 2020년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COVID19으로 인해, 동양인들이 심하게 차별받았다. 물론, 큰 이슈가 된 것은 백인경찰에 의해 사망한 흑인 한 명이었지, 수많은 아시안들이 묻지마 폭행을 당하거나 인종차별을 당한 것은 그만큼 큰 이슈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대유행 초기, 나는 외출을 할 때마다 잔뜩 긴장을 해야만 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마스크를 잘 쓰지 않으려 할 때였고, 마스크를 쓰고 다는 사람의 90%는 동양인이었다. 마스크를 쓰면 중국인이라고 싫어하고 피하거나, 심하게 욕설을 듣는 경우도 생긴 사례를 보았기에 마트에 가는 것도 조심했을 뿐더러 절대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도 않았다. 일본에 살 땐, 입만 다물고 있으면 우리를 숨기기가 어렵지 않았는데, 미국에선 어떻게해도 내가 이방인임을 숨길 수가 없다. 마치 보호색을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적의 타겟이 될까봐 잔뜩 긴장하는 카멜레온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갈 때도 동양인이 우리밖에 없으면 불안하다. 동양인이 한 가족이라도 보이면 그나마 맘이 조금 편안해진다. 아이들에게는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이른다.
그렇다고 동양인들 사이에 둘러싸였을 때 안심이 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오늘은 한국마트를 들렀다가 혹시 누가 여기에서 테러를 벌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아찔한 상상이 잠깐 뇌리를 스치기도 했다. 살 것만 얼른 집어들고 급히 마트를 빠져나오는 편이 안전하다.
애틀랜타 총격사건은 STOP ASIAN HATE 운동을 촉발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행진했고, 몇몇 유명인들이 발언을 했고, 소셜미디어에 소신을 밝혔다. 하지만 나는 1세대 이민 5년차, 소심한 이방인인지라 맞설 용기보단 무기력감이 앞선다. 이제 막 이 땅에 발을 붙인 내가, 이런 문제에 소리를 높일 주제나 되는지 자기반성을 하다보면 내 자신이 점점 작아지곤 한다. 내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힘을 내야 하는건데, 알면서도 위축된 마음은 정신무장만으로 쉽게 펴지지 않았다.
미국 문화를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해서 하게 되는 실수들을 저지르는 나를 사람들이 싫어할 수도 있겠지.
뜨내기처럼 보이니까, 아무도 말 걸어주지 않고 인사하지 않는거겠지. 오래 있다보면 괜찮아지겠지.
게다가 아이 학교에서 룸맘이나 PTA 활동을 하거나 펀드레이징에 큰 돈을 턱 하니 내놓지도 못하는 등 커뮤니티에 큰 이바지를 하지 못했으니, 나를 무시할 수도 있겠지.
어디 가서 내가 미묘하게 무시당하거나 배제당했다고 느낄 때도 그게 내 피부색보단 언어때문이지 않을까.
누가 나를 무시했다고 해서 달려가서 싸울 만큼의 언어능력도, 베짱도 없으니 나는 정신건강을 위해 그렇게 생각하고 말아버리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보며 꾹꾹 눌러놓았던 설움이 터져버렸다. 그렇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못했다. 그저 며칠간 무력하고 소심하고 조용하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애틀랜타 총격사건 희생자를 추모할 뿐이었다.
요즘 Asian American 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으려고 노력한다. 1.5세 혹은 2세, 3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엿본다.
BTS가 미전역을 휩쓸고, 미나리가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고, 한국계 배우 스티븐연과 한국계 작가 제니 한의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가 넷플릭스를 뜨겁게 달구어도
동양인이 '뒤늦게 이민와서 내 밥줄 뺏아가는 얄미운 똑똑이들'로 미움을 사온 역사가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힘없는 이방인에게 한류가 얼마나 큰 힘이자 희망인지, 그 국뽕이라는 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른다.
BTS를 듣고, 미나리를 보고, 제니 한의 소설을 읽으며,
그리고 거리에서 행진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동양인들을 보며,
이 모든 차별을 딛고서 이 땅에서 살아 버텨내준 이민선배님들을 보며,
그들이 겪었을 과거에 대한 연민, 고마움, 죄송함 같은 감정들이 한 데 뒤섞인다.
오늘 아이랑 집 앞 스타벅스에서 음료를 주문하는데 아이가 까불까불하며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탔다.
"조용히 가만히 있어봐."
"왜? 이게 누구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저기 봐봐 쟤들도 다 하는데..."
'너는 가만히 있어도 튀는 동양인이잖아.'라고 대답할 뻔 하다 간신히 진심은 속으로 꾹 밀어넣었다.
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딱 한뼘만이라도 좋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