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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단조 Mar 31. 2021

미국스타일 정情은 이런 것! 밀 트레인 사인업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이방인인데다 도움될 것 하나 없는 나같은 사람을 이유없이 받아주고, 끼워주고, 대접해준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제리였다.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서 저녁에 하는 무료 영어수업이 있어 나가게 되었는데, 오전에 하는 다른 교회의 영어수업과는 달리 퇴근 후 오는 직장인들도 꽤 많았다. 그 중 상당수가 메디컬 센터에 의사나 연구원 등 안식년으로 미국에 온 분들이었고, 영어를 많이 배울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알아가는 것은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모든 반에는 선생님과 보조교사 한 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출석을 부르고, 프린트물을 나눠주고, 종종 선생님의 질문에 호응을 해주는 게 보조교사의 역할이었다. 물론 보조교사가 윤활유의 역할을 하긴 했지만 수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은 아니었다. IT업계에 종사하는 꽤나 똑똑하고 괜찮은 사람이 왜 이렇게 아깝게 이 시간에 여기 앉아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런데, 알고보니 보조교사의 역할은 수업이 끝나고부터 시작되었다. 보조교사인 제리는 수업후에도 수시로 학생들에게 말을 걸며 친교를 나누었고, 인맥의 네트워킹을 주선해주며 이들의 적응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을 넘게 알고 지내던 제리가, 어느 날 나와 내 친구의 가족을 집으로 초대했다. 크리스마스 맞이 모임이었다. 



제리는 대만출신으로, 고등학생때 이민을 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부모님과 같이 왔다가, 부모님이 집을 한 채 덜렁 사주시고는 다시 대만으로 돌아가셨단다. 부모님이 주신 집에서 혼자 대학을 다니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지금은 그 집에서 장인 장모님까지 모시고 살고 있다. 제리의 아내는 마카오 출신으로 제리가 여름에 잠시 대만에 돌아갔다가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첫눈에 반했으니 결혼을 해 데리고 와서 살고 있는 거겠지.

제리의 아내 엘렌은 한국드리마와 음식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나도 한국 드라마라면 빠지지 않고 보는 편인데 엘렌은 나보다 한국 드라마를 더 잘 안다. 심지어 휴스턴에 있는 한국음식점도 한국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자주 갈 정도이다. 한국을 좋아해서 그런가 외모는 애교많고 친화력있는 한국사람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얼마나 다정하고 사람들을 잘 챙기는지 모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동네에선 한 다리 건너면 엘렌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엘렌의 인맥은 끝이 없었다.  


초대를 받아 간 자리에서는 끊이지 않고 수다가 이어졌다. 음식 이야기며 휴스턴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이며, 한국 드라마 이야기까지. 다음 모임은 음력설날로 해서 각 나라의 음식을 준비해 팟럭 파티를 하자는 계획까지 세웠다. 엘렌 부부는 6개월 후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드라마에서 보았던 장소를 직접 가 볼 생각에 무척이나 설레는 눈치였다. 나도 같이 가서 가이드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아쉬워했다. 


그렇게 따뜻했던 크리스마스 모임을 마치고 4일 후에, 갑자기 놀라운 연락을 받았다. 같은 반 영어 선생님으로 부터 온 이메일이었다. 

제리네 가족이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제리 빼고는 온 가족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고. 상황이 심각하니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너무 놀라서 그 날은 잠도 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사고였던걸까. 


다음날 자세히 들어보니, 맞은편 운전자의 과실로 정면추돌 후 길 아래쪽 두렁으로 차가 떨어졌다고 했다. 운전자인 제리는 멍 외에는 큰 외상이 없었지만, 아이들과 아내는 심각한 상황이어서 바로 응급실로 이송되었다고 했다. 


엘렌은 팔이 세 동강이 나 두 번에 걸쳐 수술을 받아야 했고, 척추 수술도 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의식도 없었고 가족중 가장 심각한 상황이라 했다. 척추보호대를 한동안 해야 해서 두 달간은 정상적인 생활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이란다.

큰 딸은 의식 불명으로 사고 직후 헬기로 이송되었다고 했다. 다른 가족들은 엠뷸런스를 탔는데 혼자 헬기를 탈 정도였다니. 팔 골절과 에어백으로 인해 이마가 찢어진 건 별 것도 아니었다. 안전띠로 인한 충격으로 간 등 장기에 큰 쇼크와 출혈이 있었다고 했다. 

둘째딸은 에어백때문에 얼굴이 막 경기를 마친 권투선수같이 부어있었다. 코뼈와 얼굴뼈에 금이갔고 얼굴이 너무 부어 시야 확보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보기에는 제일 아파보였지만 다행히 아빠 다음으로 경미한 편이었다. 


휴스턴은 워낙 운전을 험하게 하는 사람들도, 비상식적으로 운전하는 사람들도 많아 교통사고가 늘 자주 있긴 하지만, 이렇게 며칠전에 몇개월 후에 있을 여행을 이야기하며 들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기니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뒤이어 누군가가 작성한 이메일의 사인업(sign up) 링크를 보고서야 실감이 났다. 


딸 L과 같이 한시간쯤 놀아줄 사람.

딸 L과 같이 밤을 지새워줄 사람.

엄마 엘렌을 보러와줄 사람. 

보호자 제리를 위해 식사를 제공해줄 사람. 


이렇게 여러 항목으로 나눠준 지원자 모집 링크에는 빈칸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써두었다. 정말 가도 민폐가 아닐까? 하던 고민은 그 많은 이름들을 보는 순간 바로 사라졌고, 빨리 빈칸을 찾아 내 이름을 써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곧, 병원에 가서 그 집 딸과 엘렌을 만났고, 제리가 먹을 저녁식사거리도 준비했다. 제리는 배가 고팠다며 선 자리에서 잡채 한 그릇을 뚝딱비워버렸다. 그리고선 걱정하고 마음 아파하는 나에게 제리는 감사한 점들을 이야기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병원밥을 잘 먹지않는 딸을 걱정하면서 딸의 병실까지는 갈 수도 없는 엘렌의 걱정을 듣고선

딸이 좋아한다는 야채를 잔뜩 준비해서 가져다주기도 했는데, 야채3종세트를 얼마나 아삭아삭 맛있게 잘 먹는지 야채를 잘 안먹는 우리 딸이 자기도 하나 먹어봐도 되냐고 물을 정도였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그들이 퇴원을 한 후에는 또다시 '가족들을 위한 식사 준비해줄 사람' 이라는 사인업 링크가 돌았다. 다행히 온 가족이 퇴원은 했지만, 제리는 다시 회사로 복귀해야 했고, 엘렌은 거동이 불편해 식사준비를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른2명. 아이2명.

치즈는 빼주세요.

좋아하는 음식 - 아시안 음식 (한국, 태국, 베트남), 모든 종류의 과일(베리류, 사과, 배)이나 야채(파프리카, 브로콜리, 오이)


매일 저녁식사를 제공해줄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적기시작했는데 너무 순식간에 다 차버려서 추가로 몇 주가 추가될 정도였다. 음식을 만들어서 가져다주는 친구도 있었고, 우버이츠를 통해 어느 레스토랑에서 뭘 사보내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그들이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정을 주고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점심도 필요할 것 같아서 물어보니, 점심은 이미 큰 아이 학교 학부모들이 자원해서 돌아가며 배달해주고 있다고 했다. 


제리&엘렌네 집에 가져갔던 불고기떡볶이와 김치찜


미국 교회에선 이처럼, 밀트레인(Meal Train)이라는 것을 자주 운영하고 있었다. 누군가 아플 때, 수술을 하거나 출산을 했을 때 사람들끼리 십시일반으로 한끼씩 도와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식사제공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에서 필요한지, 가족들의 특이한 식단이나 선호하는 음식, 좋아하는 식당, 안먹는 음식, 알러지 정보까지도 자세하게 서술하는 편이다. 미국 사람들은 취향에는 솔직한 편이라 뭘 사면 좋을지 분명하게 적혀있어 좋았다. 

홈메이드 음식을 만들어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배달해 주기도 하고, 배달앱을 통해 음식을 배달시켜주는 일도 많아보였다. 응답하라 1988에서 보던 음식 나눠먹는 정이, 미국에서는 조금 더 실용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반갑기도 했다. 여기서 배운 이런 문화의 영향을 받아 출산한 일본 친구에게 음식을 좀 만들어 집앞에 놓고 가겠다고, 아니면 식당에서 사서 배달이라도 해주겠다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거절을 했다. 나라마다, 출산을 축하하고 응원하는 방법은 다양한 법인가보다. 


사고 후 한달 후쯤 엘렌은 답례품으로 시부모님이 대만에서 보내신 파인애플케이크를 잔뜩 보내왔다. 한국여행은 당연히 무산되어 아쉬워했다. 중간중간에 한 번씩 만나다가 다시 음력 설 모임을 추진하려던 차에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이 닥쳤다. 결국 모임은 무산된 채 일년째 그 가족을 못보고 지내고 있다. 내가 직접 담근 김치가 맛있다고, 뭐 해준다고 할 때마다 김치를 달라던 엘렌. 내가 만들어준 잡채를 눈 깜짝할 새 흡입해버리던 제리. 얼른 팬데믹이 끝나서 맛있는 한식을 차려놓고 초대할 날이 오면 좋겠다. 


아프거나, 입원하거나, 출산을 한 적은 없지만 내가 힘들거나 지칠 때 나에게 음식을 배달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 미국 친구로부터 음식을 받아본 건 허리케인 하비로 휴스턴이 완전히 마비되었을 때였다. 당시 우리집은 간신히 침수를 면했지만, 지붕에서 물이 새서 우리집으로 대피해온 가족이 2주정도 머물렀었다. 아주 작은 아파트에 두 가족이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 생각했는지, 친구는 매 끼니를 준비하느라 힘들 나를 위해 미국식 칠리스프를 끓여왔다.


그리고 남편이 한국으로 출장 간 지금, 열흘에 한 번 꼴로 내게 음식을 보내주시는 분이 계시다. 오늘 손님을 치르고 남은 음식이야. 우리집에 많은데 누가 과일을 가져왔네. 등등. 한국정서마냥 무심하게 말씀하시지만 정작 열어보면 정성 가득한 음식들이 한두종류도 아니고 다섯종류 이상 빼곡히 들어있다. 


직접 구운 쿠키, 직접 만든 파스타 소스, 직접 끓인 스프 등등. 


만약 식당에서 시켜 먹었다면 

'이런 걸 왜 사먹나, 같은 값이면 한국식당 가서 사먹겠다!' 하며 크게 감동받지 않았을 지극히 미국스러운 음식이겠지만

내가 매 끼니 해먹는 게 힘들어보여 이런 저런 핑계로 거절못하게 만든 후, 정성을 담아만들어주는 요리. 건네받았을 때의 묵직함에 한 번 놀라고, 혀끝보단 가슴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맛에 또 한 번 놀란다.

차갑고 냉정한 사람들 같아보이지만, 미국에도 진국인 사람들은 반드시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주는 미국의 정이라는 것도 한국의 정 못지 않게 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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