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 한국에서 3개월간의 휴가를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기대되었던 건 제인 선생님의 수업이었다.
아이가 두 돌이 되던 무렵부터 1년동안, 빠짐없이 꼬박꼬박 다녔던 수업이다. 수요일 아침은 내 일주일의 중심이었고, 집에서 아이와만 지내던 나에게 활력을 주는 탈출구였다. 물론 처음에 이 수업을 시작할 땐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내가 성경공부나 영어공부를 하는 동안, 자원봉사자들이 무료로 아이들을 돌봐준다는 이유로 등록한 수업이었으니까. 이 시간은 일주일 중 유일하게 내가 아이와 떨어질 수 있는 시간이었고 무료하고 단순하고 피곤한 육아에서 잠시나마 해방되는 꿀같은 시간이었다. 처음엔 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던 아이도 점점 그 곳을 좋아하게 되었다.
수요일 오전 열 시.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의 친교실 테이블에 둘러앉아 멋쩍은 미소를 나눈다. 대부분이 고만고만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다. 일흔이 훌쩍 넘은 할머니 두 분은 매주 우리를 위해 간식과 차를 준비해 대접해주시곤 하셨다. 때론 간단한 과일이나 빵을 사 오시고, 때론 직접 구운 파이나 절기를 기념하는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오시기도 하셨다. 절기마다 데코레이션이나 냅킨에도 꼼꼼하게 신경을 쓰셨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내려주시는 뜨거운 커피를 건네받을 때면, 낯선 땅에서 아무것도 아닌 내가, 이렇게 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늘 가슴이 뭉클했다.
간단한 다과가 끝나면 제인 선생님은 간단한 찬양 두 곡으로 모임을 시작하시곤 하셨다. 선생님은 일흔을 훌쩍 넘긴 연세로, 거동이 불편하셔서 5미터를 걷는데 1분은 걸리시고, 손가락도 모두 휘어져있었다. 느릿느릿, 주토피아의 나무늘보처럼 본인만의 속도로 피아노 앞으로 가서 앉으셔서 건반에 손을 얹으셨다 하면 왕년의 찬란했던 과거를 엿볼 수 있었다. 노안으로 인해 때론 악보가 보이지 않아 코드반주에서 실수를 하실 때도 있었지만, 오랜 세월 갈고 닦으셨을 피아노연주와 목청은 정말 아름답고 웅장했다.
짧은 다과와 친교의 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교실로 올라가 영어수업을 했다. 대부분의 학생은 초보자였기때문에 영어 수업은 다소 쉬웠지만, 왕년에 공립학교 영어선생님이셨던 선생님은 쉽게 찾을 수 없는, 재능있는 교사였다. 쉬운 내용이라도 문화와 지역사회에 대한 선생님의 식견을 덧붙이며 알려주셨고,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쓰는 말, 옛날 사람인 본인의 호불호도 확실하게 구별해주셨다.
영어수업이 너무 좋아서 선생님을 더 알아가고픈 마음이 커지던 차에, 영어 수업 전에 성경공부도 진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수업에 한 번 참석해본 후, 이 수업이 바로 내 일주일의 1순위가 되어버렸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공부였기에, 선생님은 믿음을 권하기보단 객관적으로 역사와 지리에 기반해 이야기를 풀어주셨다. 이제까지 내가 해 온 어떤 성경공부보다도 쉽고, 담백하고, 명쾌했는데, 어떤 질문이라도 주저 않고 답해주셨고, 섣불리 본인의 해석을 덧붙이시지도 않으셨다. 해석에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셔서 도대체 그 식견은 어디서 온건지 자주 놀라곤 했다.
제인 선생님은 알라바마와 미시시피주에서 자라난 백인이시다. 1963년 존F 캐네디가 암살되던 때, 선생님은 고등학교 합창단 투어를 위해 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고 계셨다고 하니 일흔 초반이셨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되던 소식은 1968년 일본에서 들었다고 하셨다. 우연한 기회로 영어를 가르치러 갔다가 2년을 살았다고 하셨다. 일본에서 돌아오신 후 결혼을 하셨는데, 신랑은 열살정도 연상의 흑인이었다고 하셨다. 원주민과 흑인의 혼혈이었던 분과 혼인을 하셨던 시기에는 여전히 흑인차별과 인종 갈등이 심하던 시기였다. 더군다나 북부도 아닌 남부. 인종차별이 심하던 알리바마주였으니 그 시선이 오죽했을까.
결혼을 하셨을 당시는 짐크로법(흑인분리법)이 폐지되었을 때였겠지만, 백인학교, 백인전용 음수대, 백인 전용 화장실, 백인 전용 버스좌석을 당연시하는 사회에서 자라셨을 선생님이 흑인과 결혼하신 이야기를 들으면 '선생님은 20대때에도 선생님다우셨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도 선생님과 선생님의 남편분의 결혼이 사회 분위기상 아주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었다. 결혼 초기에 부부가 손을 잡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 부부를 쳐다보았다고, 선생님은 당당하게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해주었다고 하셨다. 이제는 그런 남편을 보내고 혼자 살고 계시지만.
당당한 20대를 지나, 지금의 지적이고, 여전히 당당하고 근사한 멋진 70대 할머니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멋진 나이듦이 있을까 싶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미국 사회에서 겉도는 느낌이 들고 외로워 낙담하는 때라도, 제인 선생님을 만나고 나면 나도 이 사회에 받아들여 질 수 있구나, 하는 조그만 희망같은 것이 싹트곤 했다. 선생님은 미국 사회와 나를 연결해주는 첫번째 다리였던 셈이다.
그렇게, 제인 선생님과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9월의 어느 날,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올 가을과 내년 봄에는 W교회에서 더이상의 영어수업이나 성경공부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슬픈 마음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내가 다년간 이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던 건 큰 축복이었어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수업을 계속 할 수 없게 되었네요. 나를 대신해줄 사람을 찾을 수도 없었어요.
여러분 모두가 그리울거에요. 여러분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오래 기억할거에요. 영어를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한 때,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주어서 고맙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