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터전
제주도에 집을 구하러 내려오기 전,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제주오일장' 부동산을 샅샅이 뒤졌다. 타운하우스나 전원주택, 또는 빌라 1층을 생각했었고 공항에서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제주 애월 쪽을 알아봤다.
드디어 부동산에 약속을 잡고 집 보러 가는 날, 제주도에는 1년에 한 번 올까 하는 폭설이 내렸다.
2박 3일 동안 집을 알아보러 왔는데 시작부터 만만치 않다. 첫날 저녁 우리는 눈길을 해치고 두 개의 타운하우스를 봤다.
마음에 드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관리가 안 된 집에는 곰팡이가 구석구석 피어있었고 너무 외진 곳이었다. 주변에는 걸어서 갈 수 있는 편의점도 없었다. 눈이 오면 고립되기 딱 좋았다.
무사히 호텔에 도착한 뒤 우리는 황당해 서로 마주 봤다.
"안 되겠다. 너무 별로야. 어떡하지?"
뒤늦게 부동산에 연락해서 빌라 1층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눈 길 때문에 올라가기 힘들 거라는 답변이 왔다. 다음날, 집 보기를 포기하고 신랑의 새로운 출근지가 될 서귀포 화순항을 향해 길을 떠났다.
서귀포로 내려가면서 신랑이 꼭 한번 들러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바로 '영어교육도시'. 내비게이션으로 영어교육도시의 한 요가원을 찍은 뒤 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서귀포에 도착하자 날이 개고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상가에는 문 연 부동산이 한 군데 있었다. 무작정 들어가 집을 봤는데 동동이가 마음껏 뛰어도 되는 아파트 1층의 연세가 곰팡이 핀 타운하우스 반값인 것이다!
단지에는 사람들도 많고 상가에는 편의점, 치킨집, 카페, 요가원까지 있다. 게다가 클린하우스 찾을 필요도 없이 단지 내에서 쓰레기를 분리수거할 수도 있다.
그렇게 둘 다 영어교육도시에 마음을 빼앗겼고 결국 그곳에 이사 와서 살고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영어교육도시는 4개의 국제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KIS, NLCS, Branksome Hall Asia, St. Johnsbury Academy) 대부분 육지에서 자녀 교육을 위해 이주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렇다 보니 주변 분위기나 환경이 아이 키우기에 굉장히 좋다.
저출산으로 아이들 보기가 힘든데 이곳에는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 초, 중, 고등학생들이 굉장히 많다. 단지 내에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도 많고, 국제 학교 선생님 가족들도 살고 있어서 놀이터에서 외국인 아이들을 만나기도 쉽다.
그렇다고 전부가 국제학교 학부모인 것은 아니다. 옆집에는 은퇴하신 할머니께서 살고 계신다. 친구들을 만나고 제주 여기저기를 놀러 다니신다고 했다.
제일 좋은 점은 흡연자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흡연자 때문에 골치를 앓았었는데 이곳에선 담배 냄새 맡을 일이 거의 없다.
동동이는 관리동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고 앞으로 2년간은 여기에 다닐 수 있다. 7세부터는 병설 유치원이나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국제학교 학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동동이가 국제학교에 가려면 내가 국제학교에 취업을 하는 수밖에 없다. 하하^^
제주 사람들도 가 본 적 없다는 영어교육도시. 출퇴근이 가까운 거리에도 불구하고 남편 회사 직원들 중에 여기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도시의 편리한 생활을 누리며 살기에는 참 괜찮은 곳이다. 이마트, 홈플러스 같은 대형 마트 배송도 되고 마켓컬리 쿠팡도 잘 온다.
소아과가 없어서 걱정을 했었는데 직접 의원에 가보니 걱정이 없어졌다. '가정의학과' 선생님이 친절하게 잘 봐주신다. 약도 소아과에서 받는 약이랑 다를 바가 없다.
잠깐 차를 타고 바깥으로 나가면 산방산, 사계해변 등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자연 속에 숨어있는 도시랄까?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더불어 내 영어 실력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다 못해 동동이랑 놀이터에서 놀 때도 옆에서 외국인 아이들이 영어로 말하면서 같이 놀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감사할 따름이다.
육지에서 힘들게 이사를 온 만큼 최대한 오래 살고 싶다. 한편으로는 다음에 집을 구할 때는 아늑한 마을 아담한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 다는데 동동이기 귓등으로 영어를 듣고 영어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기를 바라본다.
*사진: Unsplash의Erika Fletcher : 실제 영어교육도시 국제학교와는 무관한 'unsplash'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