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희 Mar 22. 2023

옛날사람들은 5-10명씩 어떻게 키웠을까?

현시대의 육아가 어려운 이유

외할머니는 아이가 7명이었다. 친할머니는 아이가 6명이었다. 시어머니는 아이를 5명을 낳으셨다. 먹고살기도 빠듯했던 40평대 널찍한 아파트도 없던 그 시절에, 남편들이 육아를 적극적으로 도와야겠다는 생각도 없던 그 시절에, 옛날 엄마들은 그 많은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을까?

한두 명도 힘들어 허덕이는데, 시어머니께 다섯 명을 어떻게 키우셨냐고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물론 힘들었지만, 지금 시대만큼 힘들지 않았다고 답 해주셨다. 할머니 시절엔 더 했으리라.


과거에는 공동육아가 자연스럽게 가능했다. 대가족으로 살면서 할머니와 시집 안 간 고모들이 아이를 같이 보기도 했다. 큰아이가 어린 동생들을 키우기도 했고, 온 동네가 아이들을 키우기도 했다. 또래와 어울려 앞집으로, 옆집으로 삼삼오오 여기저기 잘 놀러 다녔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오롯이 엄마 혼자의 손은 아니었다. 내가 어렸을 때 동네 아줌마가 볼일이 있다며 우리 엄마에게 이따금씩 아기를 부탁하고 간 기억이 난다. 아기가 낯을 가리는 바람에 엄마가 하루종일 업고 다른 집 그 아기를 돌봐주었다. 그래도 그런 일이 딱히 민폐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잘 모르는 지금처럼, 사회가 개인주의적이지 않았고 범죄의 위험에도 크게 노출되지 않았다. 아파트가 많지 않았고, 골목문화가 있었다. 동네 한 바퀴를 돌면 동네 어른들은 모두가 나를 어느 집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엄마 없이도 잘만 싸돌아 다녔다. 엄마한테 전화 한 통 만하면 또래 아이가 있는 친척집에 가서 며칠씩 자고 오는 날도 있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밖에서 알아서 놀다가 해지기 전에만 잘 들어오면 그만이었다.   



아이의 교육과 발달에도 지금처럼 높은 관심은 없었다. 아프지 않고 그냥저냥 자라면 되었다. 집에 있을 때면 재밌는 만화영화나 보고, 엄마가 해주는 간식이나 신나게 먹으면 끝이었다. 방학이라고 특별한 체험이나 교육을 받지도 않았다. 하루하루 더위를 느끼고 추위를 느끼며 편안하게 시간을 보냈다.


내가 연년생으로 둘째를 낳고, 친정이모가 내 둘째 아이를 봐주시기 위해 일 년간 오셨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내가 애를 셋이나 키웠는데, 옛날에는 몇 개월에 뭐 해야 되는지 이런 건 하나도 모르고 키웠어.” 옛날엔 애착이란 단어도, 재접근기라는 단어도 없었다. 포대기로 키우며 아기는 자연스럽게 엄마의 품을 느꼈으리라. 시어머니도 다섯이나 키웠지만 젖병 언제 떼는지도 딱히 몰랐고, 애들 마다 달랐다 하셨다. “아들은(제 남편) 한 네 살까지도 젖병에 크게 구멍 뚫어서 술술 마셨지.” 지금 네 살 아이가 젖병에 뭘 넣고 마신다 하면 너도나도 입 댈 일이다.    



과거에는 사는 방식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살아가는데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별별 육아용품들이 애초에 없었으니 필요성도, 불편함도 몰랐다. 엄마가 아이의 발달에 대해 구구절절 몰라도 아이는 자연히 별 탈 없이 자라났다. 인터넷이 없으니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다른 이들의 삶을 시시콜콜 보며 비교할 일도 적었으리라. 아이의 옷은 당연하게 물려 입고, 구멍 난 옷을 기워입어도 전혀 흠이 아니었다. 콧물이 줄줄 나도 큰 병 아니면 병원도 잘 안 갔다. 미세먼지가 많다고 아이의 야외활동을 삼가는 일도 없었다.  



그렇다. 현시대의 육아는 과거보다 어려워졌다. 핵가족화, 개인주의 팽배, 주거방식의 변화 등으로 육아는 오롯이 부모 두 사람의 몫이 되었다. 부모들의 쉬는 시간은 사라졌다. 신기하게 밥 못 먹고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아이가 태어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끝없이 벌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보니 기본 양육에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더 알아보고 해줘야 할 것들이 추가되었다. 내 아이만 무언가를 안 하는 건 아닌지, 늦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비교하며 불안해하게 되었다. 또한 환경적인 문제로 아토피, 성조숙증과 같은 병을 앓는 아이들이 많아졌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말도 못 하는 아기들도 마스크를 끼고 외출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 숫자는 줄어가는데 몸과 마음이 아픈 아이들은 많아졌다.






현시대 부모들이 힘들어하는 베스트의 문제 중 하나는 떼쓰는 아이와의 씨름이다.

아이가 울고불고 떼쓰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현시대의 엄마들은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온갖 해결책을 강구하고, 아무리 화가 나도 때리면 안 된다고 배웠기에 자신의 감정을 겨우겨우 조절하여, 교육적인 말로써 아이를 사람 만들기 위해 진을 다 뺄 것이다. 옛날시대의 엄마들은 아이가 울고불고한다고 해서 지금의 우리만큼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매’나 ‘체벌’로 상황을 심플하게 종료시켜 버렸을 것이다. (어렸을 때 엄마에게 빗자루로 맞은 기억, 아빠가 손들고 벌서게 한 기억이 떠오른다.)


현시대의 부모들이 쉬는 시간을 뺏긴 이유 중 하나는 놀아주는 것이다.

아이와 놀아주는 것을 떠올려보자. 현시대의 엄마들은 문화센터를 가고, 키즈카페를 가고, 그것도 부족하다 싶어 집에 와서 책도 읽어준다. 스티커 북부터 국민 장난감, 물감놀이와 점토 등 각종 놀거리를 집에 넘쳐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이와 함께 놀거리를 찾아 장바구니에 이것저것 또 주워 담는다. 티비를 보여주면서 내 아이가 바보가 될 것 같은 망상에 빠져 불안해하며, 주말이면 아이들에게 온갖 체험을 시켜주기 위해 밖으로 나온 가족들로 넘쳐난다. 남들 다 하는 두부와 미역, 밀가루 반죽으로 촉감놀이 안 해주는 나 자신을 게으른 엄마로 여겨버린다.

옛날시대의 엄마들은 애써서 책을 읽어주려고 크게 노력하지 않았고, 장난감이 없어도, 특별한 무엇을 해주지 않아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먹고사는 걱정에다가 아이와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가에 대한 걱정까지는 더하지 않았다. 노는 것은 그냥 아이의 일이었다. 적어도 부모가 의식적으로 해줘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없었다. 아이들은 또래와 형제와 서로 어울려 장난치고 산으로 들로 자연을 벗 삼아 놀았다.    






불과 몇십 년 새, 부모의 역할은 왜 이렇게 급격하게 변했을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로 여겨졌다. 말을 안 들으면 길을 들인다며 폭력을 가할 수 있었다. 부모의 노후와 집안의 생계를 위해 어릴 때부터 일하기도 했다. 아이가 하나 더 태어나는 것은 집안의 일꾼이 하나 더 늘어났다고 여겼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부모는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자식은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개념이 있었다. 말 안 들으면 발가벗겨서 엄동설한에도 내쫓을 수 있는 부모의 권위가 있었다. 진짜 그렇게 한다고 해도 아무도 아동학대로 신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동학대라는 개념도 법도 없었으니까. “말 안 들으면 맞아야지!”가 당연한 시대였다. 어른들은 아이의 말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서구 사회가 개인과 인권의 개념을 발달시키면서 19세기부터는 아이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육아의 새 물결이 시작되어 아동의 심리, 발달에 대한 연구들이 활발해졌다. 엄마와의 애착이 아이의 발달에 아주 중요하다는 애착이론과 각종 교육학적 지식들이 논문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1989년 ‘유엔아동권리협약’으로 아동의 복지에 최선을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전 세계에 공포되며, 어린이의 삶은 개선되었다. 짧은 시간 동안 모든 세상은 아이가 가장 중요한 존재로 급격히 변화된 것이다.


그에 따라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더 많은 역할이 부여되었다. 엄마의 행복이 아니라, 엄마의 노력이 훨씬 더 중요해졌다. 사랑을 주되 과하면 안 되고, 정서적으로 결속되어야 하되 독립을 시키는 게 목표란다. 엄마와 애착이 잘 형성되지 않으면 아이의 발달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둥, 불안한 엄마 밑에서는 아이도 정서적으로 불안하다는 둥, (심지어 내 사랑 오은영 박사님 조차) ‘문제 있는 아이는 없다. 양육방식에 문제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육아 서적만 살펴봐도 “~하는 엄마가 ~하는 아이를 만든다”라는 제목이 부지기수다.


내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에게 모두 영향을 준다고 하니 지나친 부담과 압박으로 다가오며,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21세기 현시대 엄마들에게 육아를 더 어렵고 버거운 것으로 느끼게끔 하고 있다. 엄마의 육아 방식이 아이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니 숨 막히지 않는가.


과거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니다. 부모는 아이를 존중하고, 체벌하면 안 되며, 교육을 통해 개성과 잠재된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해야 한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사랑과 지지를 충분히 줄 수 있는 엄마에게 자꾸만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말들은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육아는 오롯이 엄마의 몫이 된 시대. 엄마의 쉬는 시간이 사라져버린 시대. 엄마의 역할은 과연 어디까지가 끝일까. 물건에만 미니멀을 할 것이 아니다. 엄마의 역할에도 미니멀이 필요하다. 현시대의 육아가 이렇다고 해서 모든 육아맘들이 거기에 편승할 필요는 없다. 투덜투덜 욕을 하면서도 꾸역꾸역 그 과중한 역할을 다 하고서는, ‘육아는 고통’으로 결론짓고 싶지 않다. 나는 나부터 조금이라도 엄마가 편한 육아를 추구하며 이를 전파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모성애가 없는 엄마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