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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희 Mar 27. 2023

내 욕구가 무시될 때 육아는 가장 고통스럽다

엄마가 제일 우선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내가 없어진 것 같아요.”


아기를 낳기 전까지,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음식을 먹었다. 퇴근 후에 재미난 프로를 보며 늦게까지 실컷 놀다가 잤다. 주말이면 좋아하는 사람과 어디로 놀러 가볼까 하며 예쁜 옷도 사고 설레어했다. 자아실현을 위해 교육받으며 자랐고, 직업을 가지며 정체성을 찾았다. 돈을 벌고 나를 위해 쓰며 배우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배워가며 나는 나로 잘 살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그런 나는 이제 없어지고 엄마라는 역할로만 살고 있다. 나의 하루는 나를 위해 쓰이지 않는다. 분명 하루 종일 피곤하게 일을 하고 있는데, 사회로부터는 일하지 않는 경제력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애 낳고는 하루아침에 집에서 애들 뒤치다꺼리나 끊임없이 하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느끼는 점이 바로 ‘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말은 자신의 욕구가 전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부터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모두다 말이다.우리는 엄마가 된 후 내면의 소리, 나의 욕구가 무시당하는 느낌을 상당히 받는다. 가족들을 위한답시고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먼저 억누르기도 한다. 엄마는 왠지 희생해야 할 것 같고, 아이가 먼저여야 할 것 같고, 돈을 안 벌거나 남편보다 적게 버니까 자유롭게 요구하면 안될 것 같아서.    



그러면서 아이를 탓하게 된다. “너희 때문에 엄마는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살았어. 너희 때문에 엄마는 희생하며 살았어.” 생각해 보면 아이는 엄마에게 희생하라고 말한 적이 결코 없다. 자잘한 욕구를 희생하며 살아봐야 아이는 잘 알지도 못한다. 알게 되어도 자기 때문에 희생한 엄마에게 미안함, 죄책감, 부담감 같은 감정이 들뿐이다. 아이를 위해 엄마의 욕구를 참고 희생하는 것은 더 이상 아름답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과거에 그렇게 희생하며 살았던 엄마들일수록 자신의 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시집가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시집가더라도 애는 꼭 안 낳아도 돼.”



내 마음에서 우러나서 즐겁게 하는 일이 아닌, 나를 참아가면서 타인을 위한다는 것은 결과가 좋지 않다. 아이와 남편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다가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고 실망시키고 있는 셈이다. 참고 인내하는 착한 엄마의 육아는 결국 우울해진다. 하기 싫어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이 ‘엄마라서’라는 간단한 이유 아래 모두 묻어졌다. 왜 그동안 엄마는 당연히 피곤하고, 힘들고, 인내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동안 엄마가 되면 아이가 나보다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엄마는 왜 사회적으로 희생의 아이콘이 되었을까. 엄마가 편하고 즐거우면 그 좋은 에너지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간다는 걸 엄마 스스로가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우선순위로 두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과일은 내가 제일 예쁘고 좋은 걸 먹자.

가족 여행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상품권이 들어오면 내가 사고 싶은 것 사자.

저녁메뉴는 내가 먹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걸로 정하자.

보고 싶은 프로가 있다면 애들 아이패드 틀어주고 내가 당당하게 큰 티비로 보자.

애들 머리는 집에서 대충 가위로 잘라 주더라도, 나는 미용실 가서 돈주고 예쁘게 하자.






물론 아이를 가진 순간부터 많은 제약이 있다. 아이를 놔두고 훌쩍 어디론가 가볍게 떠나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전처럼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아이를 낳고 싶어서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부분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대신 가능한 부분에서부터 나를 찾으면 된다. 작은 일이라도 생활 전반이 내 위주가 되면 엄마는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나를 제일 먼저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 욕구를 늘 우선시해서 챙긴다면 충분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은 일단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고통스럽다. 밥, 잠, 화장실 (먹고 자고 싸고). 아이가 어릴수록 엄마의 기본 욕구는 채워지기 어렵고 엄마의 삶은 피폐해진다. 그럴수록 최선을 다해서 엄마의 욕구를 엄마가 지켜내야 한다.   


나는 밥 먹을 때 끊기는 게 너무 싫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때가 많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아이들의 요구와 챙겨줘야 할 것들 때문에 밥 먹을 때 최소 열 번은 끊기는 것 같다. 나는 그 부분에 특히 민감하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에, 남편이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엉덩이 먼저 떼지 않는다. 시댁이나 친정에 가도 ‘누가 가도 가겠지 뭐’하며 열심히 내 밥 먹는다. 밥 먹을 때 가족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을 믿고 아이를 쳐다도 안 본다. (다른 사람들에게 밥 먹다 끊기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지만, 나는 매일 겪는 일이니까 좀 뻔뻔해도 된다.)

밥 먹을 때만큼은 오롯이 밥만 먹고 싶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게 아니라 천천히 ‘맛’이라는 걸 좀 느끼고 싶다. 나는 내 욕구를 그렇게 지켜내는 중이다. 아이들과 나만 있을 때도 자잘한 요구사항에 “엄마 밥 먹고 있어. 밥 다 먹고 해 줄게. 기다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아이가 울고 칭얼거리더라도 엄마 화장실 먼저 가고, 양치 먼저해도 된다. 엄마 밥마저 천천히 먹고 챙겨줘도 된다. 그 정도 늦는다고 별일 없다. 아이의 요구에 0.1초 만에 반응을 보이며 미사일처럼 달려 나가지 않아도 충분히 잘 케어해 주고 있다.   






아직 어린 두 아이가 돌아가면서 자주 아프기 때문에, 안 아픈 황금 기간 동안에는 최대한 내시간을 나에게 쓴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실컷 논다.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있는 한 몽땅한다. 핫한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서핑을 가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배우고 싶은것도 배우며 자아실현의 욕구를 채운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낮시간 동안 실컷 놀다 오면, 아이와 남편에게 괜히 미안해져 더 상냥하게 대해진다. 내 욕구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나면 아이들이 좀 힘들게 나를 괴롭혀도 버겁지 않게 느껴진다. 훨씬 다정하고 유연한 엄마가 된다.



그 시간 동안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장을 보고 요리를 만들고 했더니 짜증만 더 난다. 기껏 청소한 집을 5분 만에 어지르고 기껏 요리한 음식을 잘 먹지도 않는 아이들에게 화내게 된다. 남편에게는 내가 낮에 노는 줄 아냐고 히스테리 부리게 된다.  


가족들은 어떤 엄마를 원할까? 깨끗한 집을 어지른다고 혼내는 엄마? 먹기 싫은 영양만점 음식을 강요하는 엄마? 시키지도 않은 일 열심히 하고 예민하게 바가지 긁는 마누라?  



집이 좀 지저분하고 화려한 반찬이 없더라도, 가족들은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엄마를 원할 것이다. 밖에서 이래 저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와서는 집에서 편안하고 포근하게 쉬고 싶을 거니까. 그러기 위해서 엄마는 나만의 시간에 내가 하고싶은거 하면서 쌓인 욕구와 스트레스를 잘 풀어야 한다. 내가 기분 좋아야 가족들에게도 기분 좋게 대해진다. 내가 마음 편해야 가족들에게도 편하게 대해진다. 그게 지혜로운 엄마다. 내 욕구 참고 고통스러운 육아를 하는 엄마는 뾰족해져서 결국 화풀이를 가족들에게 하게 된다.   






엄마들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억누르고 있다. 엄마 스스로가 자신의 욕구를 중요하지 않게 여겨버리면,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당연한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엄마는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이보다 나를 우선에 두어야 한다. 그래야 육아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엄마가 있어야 아이도 있는 것이다. 엄마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더 귀 기울인다면, 생각보다 나를 지킬 수 있는 것들이 꽤 많다. 아이를 키우더라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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