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발 대마왕 이야기
나는 설레발을 잘 친다.
아이를 갖고 싶을 때도 안에다 하기만 하면 바로 되는 줄 알고, 하자마자 벌써 임신한 것 마냥 설레발을 치며 남편을 들었다 놨다 했다. 서핑을 다시 시작할 때도 만년초보이면서 이미 프로 선수가 된 것처럼 설레발을 치며 노즈에 서있는 짜릿한 상상을 하며 신이 났다.
그게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무언가 잘되는 상상을 하는 게 너무 신난다. 누군가는 경우의 수를 따지며 플A, 플랜B, 플랜C 등등 계획대로 안될 상황을 생각한다는데 나는 반대다. 어차피 그다지 확실한 계획이 없고, 뭘 했을 때 안 되는 경우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뭐가 잘 안 되고 큰일 날 경우는 내 머릿속에 애초에 없다. 그냥 그런 건 별로 떠오르지가 않는다. 무슨 일 나면 그때 가서 어떻게든 또 되겠지라고 생각한다. 잘돼서 신나는 경우만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렇게 내 위주로 설레발 대마왕인 나는 반대 성향의 남편과 늘 옥신각신한다.
어제만 해도 오랜만에 깨끗한 하늘을 만끽하며 외출했는데 남편이 "애들 찬바람 너무 쐐서 밤에 열오를 것 같다. 그만 들어가자." 한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노트북 거기다 두면 떨어져서 액정 나간다. 노트북 거기다 두면 윤우가 밟아서 고장 날 거야"라고 한다.
“대체 그런 생각을 왜 해? 여보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안 일어나. 왜 이렇게 사람 괜히 겁주는 거야. 그만 좀 초쳐”
남편은 그런 내가 철없어 보이고 답답할 테다. “여보는 진짜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생각 안 한다.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한다.
그나마 팩폭 잘해주는 남편이 있어서 폭주기관차 같은 내 설레발은 겉으로는 조금 잡아지는 편이다.
실제로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아도 그 속에서 예상치 못한 배움이 늘 있었다. 안에다 하면 바로 생길 줄 알았던 아이가, 암만 노력해도 몇 년간 생기지 않아 매달 생리 때마다 좌절했었다. 결국 힘든 시험관을 진행할 때도 내 그릇이 조금 커지는 것을 느꼈다. 삶이 내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 아이를 갖기 위해 삶이 고달파져 보니 힘든 사람의 심정을 그래도 조금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배워갔다.
힘주는 건 자신 있어서 애도 흡! 하면 응애! 하고 숨풍 낳을 줄 알았다. 자신만만해하며 겁도 없이 설레발쳤는데, 27시간 진통하고 응급제왕 했을 때 또 깨달았다. '아이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구나'
이러나저러나 예상대로 되지 않을 때 더 신선하고 재밌을 때가 많았다. 좁은 내 세계가 훨씬 확장된 느낌이랄까.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면 최악의 상황이라는 건 현실에 없다.
“최악이야.”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래서 너 죽었니?”라고 물어보고 싶다
죽을뻔한 거지 죽은 건 아니니까. 거기서 또 배움이 있는 거고 더 나은 다음이 있는 거다.
사실 설레발이 실패할 때마다 쪽팔림은 내 몫이다. 다행인 건 낯짝이 두꺼운지 뭔지 나는 쪽팔림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는 것. 뭘 하든 진심인데 심각하지는 않달까? 가끔 이불킥 하면 그만이다. 술 한잔에 훌훌 털어버리면 그만이다. 다들 실패하고 실수하며 그렇게 사는 거지 뭐.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아니겠는가.
호기롭게 첫 그림책 투고를 하고 퇴짜를 맞았다.
설레발 대마왕답게 투고 메일 보내기도 전에 인스타에 피드를 올려서 이미 책이 나온 것인 양 여러 사람들에게 축하도 받았다.
더 웃긴 건 설레발이 얼마나 심한지, 책의 절반만 완성하고 벌써 신이 나서 출판사 여러 군데 메일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놓고 출간 의향이 없더라도 부족한 점이 있으면 꼭 알려달라고, 소중한 배움을 얻겠다고 메일에 썼었다.
남편이 그 사람들 엄청 바쁠 텐데 돈도 안 되는 피드백을 공짜로 시간 내서 해주겠냐고,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대답은 “그렇겠지?” 했지만 내심 내 설레발은 퇴짜를 맞더라도 한 명이라도 꼭 좋은 피드백을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진짜 너무 감사하게도 진심을 담아 촌철살인과 같은 피드백을 주신 분이 있었다.
수많은 원고를 보는 사람들이니까, 밥 먹고 동화책만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의 말이 맞다. 사실 내 마음이 쓰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맥주 한 캔에 털었다. (진심 어린 조언해 주신 그분 얼굴도 모르지만 복 받으실 거다.) 내 스토리에 그림을 그려주는 그 친구는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둘이라서 참 다행이다.
지금은 절반만 보냈을 때 퇴짜 맞아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설레발치기를 참 잘했다 싶다. 완성되고 퇴짜 맞았으면 더 힘들었지 싶다. 조언을 통해 보완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더 좋은 책이 완성될 것 같아서 금방 또 신이 난다. 나도 내가 웃긴다. 이런 근자감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닌데, 처음 시작하는 둘이 만나 이렇게 진행해 나가는 것이 이 정도면 훌륭하다 싶다.
생각해 보니 브런치 작가 승인 났을 때도, 글도 하나 안 쓴 상황에서 이미 마음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구름 위를 걸었다.
최근에 남편이 백화점 상품권을 선물해 주었다.
옷 좀 사라고 할 때 "지금은 필요 없어. 필요할 때 살게" 라고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육아서 원고 투고 하면 출판사에서 계약하자고 할 때 서울 한번 가야 하니까
그때 이걸로 좋은 옷 한 벌 사야겠다!'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혼자 신났다.
하긴 남편 처음 사귀고 너무 좋아서 세 달 만에 결혼하자고 내 혼자 달력 보며 날짜 정하고 이때가 좋겠다며 설레발치기도 했다. 아직 연애 초라 내 설레발에 익숙하지 않았던 남편이 딱 낚였다. 결국 아빠한테 2년간 반대당하고 남편 힘들게 만들어서 그때부터 나는 남편의 신뢰를 잃었었다. 웃긴 건 나는 그 고난의 시간이 있었기에 우리가 더 단단해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말이 좋아 설레발이고 성격이 급한 건 나도 잘 안다.
참 가볍기도 가볍다. 나이가 더 들면 몸을 사리고 많은것이 두려워지면서 좀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직은
시작도 하기 전에 잘될 것 같은 느낌.
시작하면 더 잘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넌 이미 행복할 것 같은 느낌, 앞으로도 쭉-행복하게 자랄 것 같은 느낌에 발로키워도 큰 걱정이 안든다.
요즘은 아이를 재우면서 송장처럼 가만히 누워있는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벌써 애들(20개월, 36개월) 다 키우고 비즈니스 타고 미국여행 유럽여행 서핑여행 몇 번이나 다녀왔다.
어쩌면 그 설레발이 내 삶의 원동력인지도 모르겠다.
설레발치면서 내가 어떤 희열을 느꼈다면 그것은 설레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한 것이다. 설레발쳤다가 잘 안돼서 실망할까 봐 미리 염려하며 애써 차단할 필요까진 없다. 설레발이 주는 재밌는 에너지를 당신도 마음껏 누렸으면 한다. 로또 한장 사면 마음은 벌써 당첨되서 돈 어떻게 쓸지 상상하며 일주일이 즐겁지 않은가?
내 설레발로 인해 주변사람 낚이게 해서 힘들지 않게 하는 건 중요하겠지만.. 이미 남편은 내가 신나서 지껄이는 말을 어느정도 필터링할 능력이 갖추어 졌을 거라고 본다.
지금도 나는 글을 쓰는 중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재밌게 읽을까 속으로 설레발치며 웃고 있다. 결과가 어떻든, 일단 그 과정이 즐거웠으면 된 거다. 잘안되도 쉽게 꺾이지 않고 그냥 계속 하면 되는 거다.
안되는 걸 상상하기보다 되는 걸 상상하는 쪽이 그나마 찌든 삶에서 벗어나는 특효약인 기분이다.
좋은 기운을 모아 생생하게 꿈을 꾸면 그게 언젠간 진짜 내 삶이 될 거라고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