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현이 보고 싶은 수
새벽 6시, 문을 연 냉장고 속은 뒤죽박죽 어지럽혀 있다. 준성이 냉장고에 어울리지 않는 5개 묶음 라면과 봉지과자를 꺼내고, 아래 칸에 Buono 부오노 상표가 새긴 봉투 속에 원두를 바라보다가 웃음 짓는다. 냉장고 마지막 칸에 보관된 분홍색 지갑과 핸드폰을 꺼내서 거실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냉동만두는 냉동실로 가고 일부는 꺼내어 찜기에 넣고 찐다. 계란말이에다가 김을 올린 후 돌돌 말아서 썰어낸다. 계란과 파를 썰어 넣어 국을 끓인다.
준성은 소파위에 누워있는 윤수를 흔들어 깨운다. 윤수는 부스스 일어나서 준성의 얼굴을 쳐다본다.
-현, 벌써 왔어?
준성은 못들은 체 한다.
-누나, 아침 드세요.
윤수는 머리를 부여잡고 식탁의자에 앉는다. 밥 한 숟가락이 목이 메는지 켁켁 거리자 준성이 물 컵을 건넨다. 윤수는 물을 마시고는 한숨을 내쉰다. 윤수가 계속 배를 문지르자 준성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쳐다본다.
-누나 괜찮아요?
-응. 어제 술을 많이 마셨나봐.
윤수는 입을 막은 채 화장실로 뛰어간 후,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준성은 현관문 밖으로 나간다.
화장실에서 나온 윤수는 서랍을 뒤적이다가 냉장고에서 사온 원두를 꺼낸다. 커피메이커에 물을 채우고, 거름망을 넣고, 원두를 내리는 스위치를 킨다. 수증기를 내며 물을 끓던 커피메이커에서 커피가 한 방울씩 쌓인다. 윤수는 빨간색 머그컵과 파란색 머그컵에 커피를 담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윤수는 두 개의 머그컵을 들고 뒤를 돈다. 정장 입은 현이 있다. 현에게 커피를 건넸으나 현이 손목에 찬 시계를 두드리며 현관문 밖으로 나간다.
-누나 뭐해요?
두꺼운 외투를 입은 준성이 윤수에게 초록색 병에든 술병음료를 건넨다. 윤수는 양손에 들고 있는 머그컵을 식탁위에 내려놓고 준성이 준 음료를 마신다.
-혹시 오다가 정장차림의 남자 못 봤니?
-누구요? 아무도 못 봤는데요.
-그래......,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윤수는 다시 자리에 앉아 따뜻한 계란국물을 홀짝인다. 준성은 외투를 벗어두고 자리에 앉는다.
-누나, 속 아프죠. 맛있게 먹어요. 또 줄게요.
-응, 그래.
준성은 한숨을 깊게 내쉰다. 밥만 씹던 둘의 공백을 윤수가 깬다.
-너 여기 아랫집 백인에 대해 하는 바가 있어?
-잭이요?
-아, 그 사람 이름이 잭이구나.
-왜요?
-아니야, 그냥, 여자가 많은 거 같아서 궁금했지, 너는 여기 온지도 얼마 안 되는데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
준성은 김에 싼 계란말이를 삼킨다.
-제가 출근할 때, 그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더라고요, 어제 그제 봤죠. 어제 여기 이사 왔다고 인사했더니 이름을 알려주던데요. 강남에서 어학원에서 원어민강사로 일한데요. 시간되면 불어 알려준다고 했어요. 프랑스에 잠깐 살았데요.
윤수는 국물을 들이켜고 대접을 내밀자 준성은 대접을 채운다. 준성은 밥을 다 먹자 식탁 위에 놓인 두 개의 머그잔을 가리킨다.
-이거 마셔도 되죠?
준성에게 받은 대접 속 국물을 수저로 떠먹던 윤수는 고개를 끄덕인다. 준성은 파란색 머그잔을 들고 쉼 없이 마신다.
-안돼, 그건 현이 건데.
준성은 식탁위에 머그잔을 내려놓는다.
-누나, 뭐라고요?
윤수는 빈 머그잔 안을 보며 울쌍 짓는다.
-다 마신거야. 현이 건데.
준성은 못들은 채 하며 화장실로 간다. 윤수는 설거지까지 끝내고 소파에 앉아서 빨간 머그잔을 홀짝인다. 겉옷을 입고 나온 준성은 소파에 앉은 윤수에게 인사를 건넨다.
-점심은 아침에 드신 것처럼 드시면 되요.
-응 걱정 말고 잘 다녀와. 내가 알아서 끼니는 해결 할게.
윤수가 리모컨을 들고 텔레비전에 집중하자 준성의 마음은 답답하다. 윤수를 슬쩍 보고 현관문을 연다. 윤수는 냉장고 안에 있는 쥐포를 꺼내어 물고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다.
저녁 6시, 거실 소파에 앉은 윤수는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다. 준성을 말을 떠올리며, 옷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잭이 사람이 들어갈 만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빌라 입구에 서성이자 윤수는 잭이 먼저 갈 때까지 계단에서 내려가지 않고 기다린다.
예전에 신문 한 모퉁이에서 본적이 있다. 가장 비싼 주택은 대기업 총수의 소유로 이태원 어딘가에 있다고. 윤수는 하얀커피집에 다다르자 어제 CCTV 많은 주택가에 고가의 주택 중 하나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불현듯 들었다.
현은 하얀 커피 집을 인큐베이터인양 시발점처럼 여겼고, 윤수는 초록색 잎이 물결 따라 너울거리는 그 안은 어항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고가의 주택들이라면 하나씩 소유한 수족관.
저녁 7시, 화분이 있는 창가쪽 구석자리에 빈 테이블이 하나 보인다. 웨이트리스가 윤수의 기다림을 모르고 난감한 어조로 파스타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짜다고 하세요.
안에 있는 다른 남자가 흡입한다.
-안 짠데 하나상 먹어봐요.
포크와 볼이 얕은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짜네요.
-아침에 커피 마시다가 혓바닥을 데어서 그런지 맛이 잘 안 느껴지네요. 손님께 죄송하다고 해주시고요 바로 다시 만들게요.
웨이트리스가 두 명의 여자 손님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한다. 윤수는 빈 공간에 자리를 잡는다. 옆 테이블에서 영어가 앞 테이블에서 이슬람어, 그리고 간간히 들리는 일본어가 귓가에 맴돈다. 웨이트리스가 종종거린 걸음으로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한국 남녀, 웨이트리스에게 남자가 요구사항을 말하자 웨이트리스가 피클 접시를 들고 주방 안으로 들어간다. 네 번째 낀 손가락 반지가 번쩍이며 서로 맞잡은 두 손이, 동시에 내뿜는 이산화탄소마저 달콤함으로 변질된다.
30분이 지나자 웨이트리스가 손놀림하고 있는 윤수를 발견하고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죄송합니다.
-까르보나라로 주세요.
메뉴판도 보지 않고 웨이트리스에게 주문을 한다.
현이 메뉴판을 보고 아메리카노와 카페모카 두 개를 주문한다. 윤수의 손을 애무하듯 만지던 현이 말을 슬그머니 꺼낸다. ‘여기에 크림파스타를 팔았으면 좋겠어, 왠지 맛있을 거 같지 않아?’
현의 말이 윤수의 귓가에 맴돌 때 쯤, 웨이트리스가 어제보다 더 많은 연어 알을 올린 까르보나라를 가져온다. 포크를 돌려 한입 물고는 수저를 내려놓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닐 봉투에 햄, 소시지, 어묵, 과자를 들고 빌라 계단 위를 오른다. 때마침 2층에서 문이 열리고 잭은 무거운 캐리어를 끌다가 윤수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어지럽힌 물건들과 듬성듬성 묻은 붉은 자국들, 잭이 든 커다란 캐리어가 궁금해진다. 윤수의 눈동자를 인식한 잭이 다시 캐리어를 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이마에 땀이 맺힌 윤수는 말초신경이 흥분한 상태로, 백인이 웃으면서 살인을 하는 사이코패스 영화를 본 눈 앞에서 목격했다. 서둘러 올라간 윤수는 현관문을 잠그고 몇 번이나 문고리를 돌려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한다. 거실과 부엌에 불을 키고 텔레비전의 볼룸을 높인다.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정면의 텔레비전을 응시한다. 윤수는 틈틈이 현관문을 본다. 현이 보고 싶다.
준성이 현관문을 열자 텔레비전은 여전히 시끄럽고 윤수는 소파 위에서 자고 있다. 윤수의 방에서 이불을 챙긴다. 책상위에 오른 현과 윤수의 다정한 사진을 준성이 올려 보고 내려놓는다. 윤수에게 이불을 덮어주자 윤수는 몸을 준성의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입안에서 달달한 사탕이 빠져 나온듯한 음성으로 ‘현, 현아~’를 돌리자 준성의 미소 짓던 입은 다물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