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버스정류장

3. 각자의 자리에서 익숙해지기

by 나무

해가 뜨기 전 새벽 6시, 준성은 부엌에서 쌀을 불려서 전기밥통에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른다. 계란을 풀어서 소금과 후추 간을 하고 김을 참기름을 발라 소금을 뿌린 뒤 굽는다. 멸치는 볶아서 물엿으로 간을 맞춘다. 어제저녁에 사온 고등어를 손질 후 칼집을 내고 노릇하게 굽는다. 시간이 지나자 접시에 담긴 음식이 식탁 위에 오른다.


7시 반, 준성이 방문을 두드리는 인기척에 윤수는 자다가 일어나서 비몽사몽 상태로 방문을 연다.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하는 윤수의 모습에 얼굴이 빨개진 준성이 고개를 돌리자 윤수는 입을 연다.


-현, 무슨 일이야?


준성은 윤수의 말을 못 알아듣는 척 했다.


-밥 드세요.

-어. 알았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준성이 조심스레 운을 뗀다.


-누나 옷 한 꺼풀만 더 입으면 안 될까요?


준성의 말 꼬랑지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재빠르게 윤수는 방문 앞을 사라진다. 윤수는 고개를 내려 아랫도리를 살핀다. 바지는 추리닝, 상체는 속옷 위 메리야스만 걸친 상태였다. 윤수는 어제저녁에 벗어둔 반팔 티를 입고 식탁에 앉는다. 준성은 민망한지 고개를 숙인 채 밥알만 세고 있자 윤수는 입을 삐죽 거 린다.


-너, 가족끼리 뭐가 부끄러우냐?


준성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집어서 입에 가져가서 씹는다. 윤수는 준성의 태도에 한 번 더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알았어. 앞으로 주의하면 되지? 그니깐 고개 들고 밥 먹어.


준성은 고개를 들다가 윤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내린다.


-너 나보다 4살 어리니깐 24살이지, 왜 이렇게 순진한 척이야, 연애 안 해 봤어?


빨개진 볼을 숨긴 준성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한숨을 내뱉은 윤수가 밥을 먹기 시작하자 급하게 밥그릇을 비운 준성은 화장실로 향한다.


윤수가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등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익숙한 목소리, 뒤돌아보니 정장 입은 현이 서있다.


-설거지 많은 거 봐봐~ 너 아침 많이 먹었지? 식탐은 여전 하구나. 그만 좀 먹어, 배 나오면 어떡하려고, 배 많이 나오면 아무도 안 데려 간다.


설거지통에 물이 콸콸 쏟아지고 윤수는 고무장갑에 주방세제가 묻힌 수세미로 현에게 다가선다. 현이 짐짓 웃으며 머리를 쓰담 는다.


-출근해야 돼서 담에 보자.


현이 현관문으로 가자 수는 그를 배웅한다.


-잘 다녀와. 내일도 와~


현관문이 닫히고 윤수는 설거지를 하면서 콧노래를 부른다.


샤워를 마친 준성은 화장실에서 방으로 들어간 후 옷을 입는다. 윤수는 불현듯 준성의 방안의 현의 물건들이 생각났다. 현이 즐겨 읽었던 경제학개론 서적과 부의 미래, 그리고 한 두벌 옷가지들과 그의 채취가 묻은 베개가 생각났다. 윤수는 준성의 방문을 열었다가 바로 다시 닫았다. 웃통을 벗은 준성이 긴팔 티를 입고 있었다.


-누나 무슨 일이에요?


준성의 음성이 방문을 넘어온다.


-어, 아니, 그 방에 물건들이 있지 않았어?


윤수가 방 앞에서 서성이자 준성이 방문을 연다.


-여기에요? 여기에 아무것도 없었는데요.


준성의 방안에는 두 개의 가방만이 방 모서리에 놓여 있다. 윤수는 찬찬히 방안을 살핀 후 준성을 본다.


-여기, 책이나 옷이나, 그리고 이불 같은 건 못 봤어?


준성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없었는데요. 아무것 도요.

-아무것도?

-예.


준성은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윤수에게 확신을 준다. 윤수는 문뜩 어제 다녀간 현의 손에 쇼핑백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낸다.


-알았어. 어디가?

-아침에는 빵집에서 일해서요.

-잘 다녀와.


윤수은 방으로 들어가고 준성은 겉옷을 입고 부엌으로 나왔다. 설거지통이 비워 있자 윤수의 방문을 두드린다.


-누나? 누나가 설거지한 거예요?

-응

-아침에 고등어 두 마리 구워 났습니다. 한 마리를 먹었으니 다른 한 마리는 냉장고에 있으니, 점심 챙겨 드세요. 제가 확인할 겁니다.


윤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준성이 핸드폰을 내민다.


-누나 전화 번호 이거 맞죠?


윤수는 번호를 확인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누나 갈게요. 누나가 이렇게 집에 있으니깐 좋다.


준성은 빨개진 귀를 옷에 달린 모자로 가리며 현관문을 박차고 나간다. 윤수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을 키자, 어린이 프로, 아래 채널에 뉴스가 나온다.


[어제 새벽 6시경 주한미군이 서울 이태원에 한 건물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볼일을 보려 들어온 여성을 무차별 폭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현재 가해자는 용산경찰서에 불구속 입건된 상태이며 피해자는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합니다. 뉴스 최병길 기자입니다.]


윤수는 현관 문고리를 두 번 돌린 후 잠긴 문을 확인한다. 다시 소파에 앉는다. 뉴스에서 서울 이태원 한 건물이라고 비추던 장면은 어제 갔던 편의점 건물이다. 모자이크 처리된 간판을 본, 윤수의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저녁 6시, 윤수는 소파에 앉아서 테이블 위 핸드폰을 노려본다. 핸드폰이 멀쩡한지 한번 눌러보고 붉은 불이 들어온걸 보고서야 끈 뒤, 다시 핸드폰의 벨소리를 변경한다. 윤수는 부엌으로 가서 정수기에서 물 한 컵 마시고 냉장고를 열자 파와 계란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벨소리가 울리자 윤수는 재빠르게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고 실망한다.


-여보세요.

-누나 점심은 먹었어요?

-응

-여기 부오노라는 가게입니다만, 혹시 아세요? B.U.O.N.O 이탈리아어로 맛있다는 의미예요. 밥 먹고 가세요.

-걱정 마. 알아서 해결할게. 바쁠 텐데 나중에 봐.

-예. 누나 꼭 저녁 드세요.


윤수는 겉옷을 입은 후 지갑과 핸드폰과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2층에 사는 백인 남자가 어제와 다른 동양인 여자와 팔짱을 끼고 집안으로 들어간다. ‘~스키데스네’ 간간이 들리는 일본어, 이번엔 일본 여자인 거 같다. 윤수는 계단을 내려가서 이태원 골목길로 빠진다.

윤수는 어제 갔던 편의점을 피해 지하도로 내려간다. 쇼핑을 가는 여성, 궁궐, 산 등의 그림을 지나치자 국군재정관리단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붉은 벽돌의 교회 건물, 오래된 병원 간판, 정돈된 신식 거리에 외국인 반, 한국인 반이 지나친다. 음식점과 카페, 갤러리를 지나자 소품 가게, 옷가게들이 아기자기한 물품들로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유혹한다. 내부가 훤하게 보이는 옷가게 안에서 여자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그마한 얼굴과 대비되는 떡 벌어진 어깨에 실크 원피스의 끈이 걸쳐있고, 침대에 눕기 전 야릇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녀의 시선이 길 맞은편에 서있는 낯선 윤수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화들짝 놀란 윤수는 가던 걸음을 돌려 골목길 사이 가파른 언덕길로 빠졌다. 언덕길 너머의 세상은 높다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요새처럼 CCTV가 항시 예의 주시한다. 윤수는 불쾌한 시선을 뒤로 한 채 서둘러 내리막길을 밟는다.

윤수는 얼마나 왔는지, 본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해는 이미 땅으로 떨어졌다. 핸드폰으로 길을 검색하고도 한참을 헤맨다. 그때, 우연히 발견한다. 하얀 커피집, 현이 좋아해서 현을 따라 왔고 현을 닮은 공간, 현이 없으면 못 찾을 거라 포기했는데, 길을 헤매도 자석처럼 이끌려 이 가게 앞에 서있다.

윤수는 가게 안으로 문을 연다. 곳곳에 놓인 초록색 식물들로 인해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웨이터리스의 흰색 의상을 보고 안심했다.

20대 초반, 머리를 한 갈래로 묶고 눈 바로 아래 점이 있는 웨이트리스가 묻는다.


-한분이신가요?

-예.


웨이트리스의 발음이 미묘하게 귓가에 한번 거슬린다. 한산한 가게 안, 저녁 8시, 두 개의 테이블 만 채워졌다. 웨이트리스가 물 한잔과 메뉴판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메뉴판에 음료 외에도 파스타, 피자, 샐러드를 판매하는 이태리 음식 전문점이라는 표식이 있다. 윤수는 웨이트리스를 부른다.


-까르보나라 주세요.


웨이트리스는 주문과 함께 메뉴판을 가져간다. 어둠이 내린 이태원의 풍경은 붉은 벽돌로 올린 빌라들이 엮은 토양 같다. 마치 물을 주고 양분을 뿌리면 남산타워만큼 쑥쑥 자랄 느낌, 번쩍이는 전광판 너머의 화려한 클럽 안으로 수많은 헐벗은 영혼들은 빨려 들어간다.

웨이트리스가 식전 마늘빵을 테이블 위에 놓자, 윤수는 포크로 찍어 입으로 베어 먹다가 현을 생각한다. 분명 이 모습을 봤다면 뚱보라고 놀릴 것이다. 흘러내린 단발머리를 귓가로 넘기며 베어 문다.


하얀 크림 위에 약간의 연어 알을 뿌린 까르보나라를 포크로 찍어 수저를 받침 삼아 빙빙 돌아서 문다. 빈속에 위까지 느낌함을 흡수한다.


먹던 숟가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후 웨이트리스에게 계산서와 카드를 내민다.


-혹시 원두 살 수 있나요?

-원두? 완두? 원두가 뭐죠?

-한국사람 아니죠?


묻는 말에 윤수가 받아치자 웨이트리스가 당황한다.


-예, 일본 사람이에요. 물어보고 올게요.


웨이트리스가 천으로 반쯤 가린 주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원두가 뭐냐는 질문에 한 남자가 대답하고 주방에서 나온 웨이트리스가 종이를 내민다.


-여기 중에 하나 고르시면 된다고 합니다.


현이 좋다고 말한 원두를 잊어버린 탓에 케냐에서 왔다는 첫 번째 원두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내일 아침에 현이 오면 물어 봐야겠다.


-갈아 주시는 거죠?


웨이트리스는 윤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주방으로 들어간다. 한참 믹서 가는 소리가 들리고 웨이트리스 손에 은색으로 포장된 원두가루를 받는다.


-만원입니다. 총 이만 삼천 원입니다.


웨이트리스는 영수증과 카드를 내밀고, 원두가루를 쇼핑백에 담아서 윤수에게 건넨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윤수는 쇼핑백을 오른 손에 잡고, 밝은 불빛을 따라 이태원역 앞으로 나온다. 마트에 들러서 원두 거름망과 라면, 냉동 만두, 참치 캔, 과자 등 간단히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 위주로 담는다. 그리고 맥주와 쥐포도 넣는다.


냉장고에 슈퍼마켓 봉지 봉투를 넣은 후,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시청한다. 맥주에는 쥐포가 최고라고 말하던 현이 생각난다. 윤수는 맥주 한 캔을 들고 쥐포를 뜯어서 입에 문다. 시체를 토막 살해하고 캐리어에 넣어 운반한 살인사건 취재가 한참이다.




준성이 보는 거실 풍경은 텔레비전은 혼자 소리 내고 맥주 캔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윤수는 소파에 기대어 널브러져 있다. 준성은 텔레비전을 끄고 맥주 캔과 쥐포를 치운다. 윤수 위에 준성의 옷이 덮는다. 준성은 테이블에 앉아서 쥐포를 물고 잠꼬대를 하며 입을 오물거리는 윤수를 내려다 본다가 피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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