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다행이다

by 나무

진달래 지고 철쭉이 핀다. 철쭉이 피자 장미가 몽우리 진다. 봄은 짙은 꽃 향기를 남기며 흩어진다.

아무 일 없던 하루, 버스 안에 앉아서 보는 창밖의 일상은 나와 상관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상현에게 오늘은 어디서 연주하는지 질문하는 문자를 보낸 후, 시간이 흘렀으나 답이 없다. 애꿎은 핸드폰 액정만 키고 끄기를 반복한다. 막상 상현의 문자가 없으니 길고 긴 밤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현의 연주를 듣는 일이 퇴근 후 나의 일상인 탓에, 시간이 간격이 생기자 허전하다.

어디로 가는지, 내가 누구였는지 잃어버린 계절, 내 옆에 항상 상현의 음악이 있었다.


나는 클럽 앞에서 서성인다. 자주 드나들었던 공간인데도 상현이 없자 낯설게 느껴진다.

근래 상현의 대화를 떠올려 본다. 혹시 나도 모르게 그에게 상처 준 것이 있는지 되새김질해본다. 다행히 특별한 얘기를 나누었거나 사적인 충고 따위는 없었다. 어제 마지막 주고받은 대화도 클럽에 자주 오는 연인의 결혼식 축가 곡 선정이었다.

그리고 보니 어제 밤은 그와 길거리를 걸었다.




그와 클럽 폐장시간에 밖으로 나온다.

상현 : 그냥 김동률의 감사 부를 까 봐.

나 : 요즘 신혼부부들은 김동률 잘 몰라

상현 : 김동률이 얼마나 유명한데, 얼마 전에도 신곡 냈잖아. 결혼식 노래로는 감사가 딱인데, 가사도 좋고 난 나중에 결혼하면 결혼식장에서 직접 신부에게 불러 줄 거야

순간 나는 그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듣고 행복해하는 신부인 나의 모습을 상상해버린다.

상현 : 이적 노래 부를까? 이적의 다행이다 어때?

상현이 흥얼거림으로 시작한 노래가 크게 울린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 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는 거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 줄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이적_다행이다




그의 노래가 끝나자 나는 박수를 친다. 그가 쑥스러운지 코 밑을 손가락으로 긁는다.

상현 : 버스정류장이 어디지?

나 : 저기에 있어.

상현 : 너 타는 버스정류장

나 : 난 저쪽 건너편

상현은 내가 가리킨 손가락을 향해 바라본다.

상현: 지나쳐 왔잖아. 말을 하지

나 : 노래에 열중해서, 지나친 덕분에 노래 한 곡 더 들었네

상현: 내가 데려다 줄게

나 : 아냐, 넌 저쪽 버스정류장이잖아.

상현: 이 아가씨가 밤길 무서운 줄 몰라? 오빠가 가자고 하면 따라와야지.

상현이 뒤를 돌아서 앞서간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를 따라서 쫓아간다.

나 : 네가 왜 오빠야. 나보다 어린 게

상현 : 같은 학년 다니면 동갑이지, 몇 개월 많은 게 유세냐?

나 : 응. 누나라고 불러

상현 : 싫어. 너가 오빠라고 불러. 내가 너보다 정신 연령이 높아.

나 : 나 앞구르기 뒤구르기 하고 있을 때 너가 태어 난 거야.

상현 : 난 남들보다 빨리 앞 구르기 뒤구르기 해서 너랑 별 차이 없어.

나와 상현은 같이 웃는다.

나 : 진짜 친구 같다.

상현 : 친구였으면 좋겠어?

나 : 응?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뀐다. 상현은 서둘러 횡단보도를 걷는다.

나 : 같이 가

나는 상현을 따라잡기 위해 큰 보폭으로 걷는다. 상현은 나를 약 올리며 급히 걷는다.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의 헤드라이터가 버스정류장을 비춘다.

상현 : 너 저 버스 타?

나 : 어~

상현이 뛰어가서 버스를 잡는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상현이 손짓하는 대로 버스에 오른다. 버스비를 지불하고 자리에 앉자 창밖 너머의 상현이 손을 흔든다. 상현이 입 모양으로 ‘잘 가’라고 말하고 나도 ‘너도 조심히 가’라고 대답한다. 버스가 출발하고도 한참을 상현은 뒤에서 손을 흔든다.




어제 밤늦게 가다가 사고가 났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전화를 걸어본다. 전화가 부재중이다.

클럽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빠르게 밟는다. 무대 위에서 붉은 립스틱을 칠한 재즈가수가 농도 짙은 노래를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르고 클럽 안에 관객들은 음악을 감상하는 어제와 같다. 다만 상현만 이곳에 없을 뿐이다. 클럽 안을 눈길로 찾고 있는 나를 향해 웨이터가 속삭인다.

웨이터 : 오늘 상현이가 아파서 못 온데요.

나 : 어디가 아픈데요?

웨이터 : 목소리가 안 나온다네요. 노래로 밥 먹고사는 애가 목 관리를 그렇게 못해서야 쯧쯧쯧, 오늘도 맥주 드려요?

어제 저녁 내내 결혼식 축가를 고르느라 노래를 반복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나 : 혹시 상현이 어디 사는지 알아요?

웨이터 : 사생활 정보는 취급하지 않아요. 전화 안 받아요?

나 : 예~

웨이터 : 무슨 역 근처에 산다고 했는데, 어디역이였더라~

나 : 혹시 호수공원 있는 데 아닌가요?

웨이터 : 아! 맞다. 공원 근처라고 했어요.

나는 인사도 생략한 채 서둘러 클럽 밖으로 나온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지만 상현이 걱정되는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간다. 전화가 울린다. 액정에 ‘상현’ 글귀가 밝힌다.

나 : 괜찮아?

상현: 응 괜찮아~ 전화했었네 (콜록)

나 : 감기 심하게 걸린 거야?

상현은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상현 : 오늘은 노래를 못 불러 줬네

나 : 노래가 무슨 소용이야 아프지 마, 아픈 건 싫어

상현 : 걱정하는 거야.

나 : 그럼 걱정 안 해?

상현 : 아프긴 한데 그래도 기분은 좋네

나 : 어디야? 집이야?

상현 : (콜록, 콜록)

나 : 어디인데?

상현 : 우리 집? 집 나와서 지금은 작업실에 있어.

나 : 거기가 어딘데

상현 : 비밀

나 : 약은 먹은 거야?

상현 : 비밀

나 : 밥은 먹은 거야?

상현 : 그것도 비밀

나 : 장난치지 마!

상현 : 나 괜찮아,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내가 노래 불러 줄게

나 : 아니야, 푹 자~ 내일 전화할게.

상현 : 응 담에 작업실 보여줄게, 지금은 너무 지저분해.

나 : 목 아프니깐 말하지 말고 쉬어.

상현 : 응, 잘 자~

그의 전화 끝의 공허함, 나는 상현을 알지 못했다. 아니 묻지 않았다. 그가 집에 살지 않는다는 것과 그에게 작업실이 있다는 것, 나와 다른 인생의 바퀴는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굴러가고 있다.


궁금하기 시작했다.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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