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May 05. 2021

나의 위대한 그녀들

5년 전 평소와 같이 출근한 아침, 옆자리에 있어야 할 여자 대리님이 출근하지 않으셨다.


핸드폰으로 온 한마디

‘아이가 아파서 오늘 오전에 반차 써야 할 것 같아.’


아침에 아이를 들쳐 엎고 소아과 병원에 가서 긴 줄을 기다려서 우는 아이를 달래며 주사를 맞힌 후, 약을 챙겨서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를 맡긴다. 회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운전하면서 대충 화장한 채,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는다. 늦게 도착한 탓에 점심밥도 먹지 못하고 밀린 업무를 급하게 처리한다. 퇴근하자마자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서 씻기고 옷 갈아 입히고 밥과 약을 먹인 후 재운다. 그다음 에서야 자신의 옷을 갈아입고 세수한 후, 찬밥에 뜨거운 물을 따라 한 숟가락 뜬다. 그다음에 집안 청소와 설거지, 오늘 아이가 벗어 둔 빨래를 돌리며 밀린 집안일을 하고 내일 어린이집에 가져가야 할 개인용품인 기저귀, 분유, 이불, 수저 젓가락 등을 커다란 가방 한쪽에 아이 이름을 달아서 챙겨준다. 모든 일이 종료하고 나면 10시쯤, 피곤에 지친 여자 대리는 쓰러져서 잠을 잔다. 그때쯤 승진을 위해 야근한 남편이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를 낳고 싶지만,

아이를 홀로 키우기에는 부모의 손으로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가 어느 부모님께 도움을 구할 것인가부터 싸움이 시작되고, 아들 타령하던 시부모님이 막상 아기를 가지자마자 외면한다는 이야기부터, 내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키우느라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뭐하는 짓인가 한탄했다는 이야기까지, 그 와중에 열심히 돕겠다고 말한 남편은 승진에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았다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한다며 분노한다. 결국 언젠가 퇴사가 예약된 여자가 승진을 위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아이의 유치원비를 벌기 위해 출퇴근을 하며 아이가 빨리 자라기를 기다린다.


그나마 분노할 힘이 있는 것이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자주 어울리는 한 친구는 아이를 가지고 싶지만 자신의 불안정한 현실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 남편은 비정규직 대학강사고 본인은 여행사에 근무하고 있다. 더구나 시국이 시국인 만큼 여행사에서 강제로 무급 연차를 사용을 종용하고 있어서 불안감이 가중되었다고 한다. 둘이 먹고 살 돈도 부족하다는 친구는 아이는 자신들에게 사치라며 고개를 젓는다.


다른 친구는 집안이 여유로운 대기업 다니는 남편과 결혼했다. 결혼한 지 3년이 넘어가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 탓에 매주 산부인과 병원에 다니고 있다. 배란이 불규칙한 친구는 시댁의 강요에 못 이겨 최근에 시험관 수술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느 날 저녁, 우연히 연락이 닿았던 친구는 매일 호르몬제 주사를 자신이 스스로 배에 찔러서 넣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굴욕적이라고 울었다. 점심시간에 다들 커피 마시러 갈 때 몰래 냉장고에 숨겨둔 주사기와 약을 찾아서 화장실 변기에 쪼그려 앉아서 자신의 배에 찔러 넣는 느낌이란, 마치 자신이 돼지가 된 것처럼 하찮게 느껴진다는 말에 동감했다.


그 얘기를 회사 동료 언니에게 했더니, 그나마 요즘은 상황이 나아진 것이라며 예전에는 출산 휴가 후 육아휴직이 없는 시절, 냉장고와 여자 휴게실조차 없어서, 화장실이나 회의실에 숨어서 유축을 하고 모유를 아이스 팩이 담긴 가방에 넣었다가 집에 가져가서 아이에게 먹였던 시절을 설명해주신다.

 

새삼 느끼지만 엄마가 되는 것은 위대하다. 우리 엄마는 어떻게 나를 낳고 키우셨던 것일까?


어린 시절 꿈을 꾸던 소녀가 자라서 누구나 바라는 대학에 들어가서 취업을 하고 인생의 순리대로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는 꿈을 대부분의 여자들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처럼 결혼 전에 좌절된 사람도 있고, 결혼 후에 아이를 포기한 사람도 있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 지쳐버린 사람도 있으며,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인공수정을 위한 비용을 쏟아 붙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아직 가임기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두들 과거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엄마의 희생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여전히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여자 직원들에게는 남자 직원에 비해 승진이 누락되거나 다른 직원의 안위를 살피며 복직 일정을 정해야 하는 암암리의 불합리함이 존재하고 구조조정할 때는 돌아갈 남편과 아기가 있으니 제일 먼저 순위에 오르는 워킹맘들, 일부는 과장의 마의 벽을 넘지 못하고 퇴사 길에 오르게 된다.


그런 탓에 우리 사업부에는 여자 차장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업무에 열의를 다했던 그녀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여자 사무원으로 45세를 넘기는 건 정말 독종이거나 특이 케이스이다.


좀 아둔한 나는,

앞으로 나의 근무 생활이 멀지 않았음을 손으로 꼽아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별의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