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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y 17. 2021

어른 놀이


친한 여자 과장님이 알록달록 색종이를 사서 주말에 친구들과 카페에서 학을 접으려고 하였으나, 학을 접는 방법을 잊어버려서 스마트폰에서 접는 방법을 검색할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해 주었다.


회사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일도 척척 해내는 과장이지만,

어린 시절 좋아하는 이에게 보내기 위해 몇 백 마리를 접었던 단순한 종이접기 마저도 가물거리는,

평범한 어른이 되어버린 사실에 속상한 듯싶었다.


생각해보면 철없이 놀기만 했던 그 시절의 놀이는 다양했다.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손에 잡히면 놀이가 되었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학종이 넘기기, 공기놀이, 딱지치기, 말뚝 박이, 갖가지의 놀이들…,


수업시간에는 정자세로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일제히 교실 뒤편으로 모여서 얼싸안고 놀았다. 구석에서 공기놀이하고 반대편에서는 말뚝을 박으며 누가 이기고 지는지 승패와 환호성이 들린다. 그중에서 능력 있는 아이들은 왕중왕처럼 도장 깨기를 하며 옆 반의 누군가와 시합을 벌이기도 한다.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한 그들은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다치기도 했지만 얼굴에는 재미가 한 바닥이다. 그러다가 흥미를 잃게 되면 새롭게 생겨난 놀이에 탐닉한다. 각가지의 재주를 가진 아이들이 어떤 놀이에서는 우승자이나 어떤 놀이에서는 패배자가 된다. 그저 그렇게 모두들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크던 그 시절,

어른이 된 우리는 그때 그 시절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회식자리에 가면 술이라는 마법에 걸려서 내일이면 기억할 리가 없는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를 내지르거나, 아이들처럼 손뼉을 치고 까르르 웃는 모습,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사소한 말장난에도 크게 웃어넘기는 그들, 회사에서의 지위와 직책 때문에 짐짓 있는 채하고 아는 채 해야 하는 어른이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다시 아이가 된다.

아이들처럼 놀고 싶지만, 이미 어른이 된 그들은 불가능하기에 다양한 술의 마법을 탐닉한다.

그러나, 12시가 되면 신데렐라처럼 어떤 요정의 마법이라도 풀려버리고 민망했던 어제를 벗 삼아 다시 어른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다만, 마법을 사용한 대가로 어른의 몸과 영혼을 요정들이 맛있게 갉아먹는다.


웃고 떠들던 아이들이 대학 입시, 취업, 결혼, 육아 등 생애의 주기를 겪어가면서 놀이를 잃어버렸다. 마치 거세된 감정들처럼, 진지하고 과묵해진 억눌린 무게감으로, 바쁜 삶을 쪼개며 쓰디쓴 커피 한잔으로 버티는 고독한 어른이 되어 간다.


웃을 수 없어서, 밤늦게 TV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를 그저 듣고 있는 것이 평범한 어른,


그래서일까? 어른이 되어서 논다는 것 자체가 부정적이고 낙오자처럼 여겨지는 것이,

평범한 어른이라면 절대 놀면 안 되는 것처럼,

인간이라면 의례 노는 것이 당연한데도,

무책임한 인간이 되어버린다.


어느 날 갑자기 사회 시스템에 떠밀려서 강제적으로 놀아야 할 때가 오면, 재미있게 놀아본 적이 없는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놀아야 할지 막연하다. 놀이를 스케줄표처럼 촘촘하게 쌓다가 맥이 빠져서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나마 명랑했던 몇 달이 지나고 월급날이 두세 번 지나가면,

결국 사회에 도태된 사람인양 마음이 불안한 채로 놀지도 못하고 주눅 들어 버린다.


참 가엾다 어른이라는 사람들,

슬프도다 나의 동지들이여.


어른들에게도 놀이가 필요하다.

별 것 아닌 것들에 웃던 그때 그 시절의 놀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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