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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09. 2022

효율적인 인생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


한참 동안 모니터를 노려보며 엑셀로 숫자를 조합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컴퓨터가 다운되자 정신이 혼미해진다. 급하게 시스템 담당자에게 유선상으로 문의하려고 하였으나, 담당자도 바쁜지 연결음만 서너 번 듣는다.

멍한 채 앉아있다가 번뜩 정신이 들자 오늘까지 데이터를 넘겨 달라는 담당자의 음성이 귓가에 울린다.

나는 남은 시간을 계산한 후,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일을 하고 퇴근할 수 있는지를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업무시간도 체계적으로 분배해야 할 만큼, 세상은 참 효율적이라는 단어에 길들여져 있다.


2G 폰에서 3G폰으로 어느새 LTE를 넘어 5G 시대에 도착했다. 스마트 폰을 켜면 몇 분 안에 수많은 데이터가 쏟아지는데도 기술은 6G를 준비하고 있다.      


기술을 넘어 우리의 인생도 빠르고 효율적인 것에 ‘좋아요.’가 많아진다.    

 

신문에서 간혹 보는 최연소 합격자들,

공부를 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젊은 나이에 효율적인 방법으로 짧은 시간에 합격하는 것이,

오랜 시간 엉덩이 힘으로 합격하는 합격자들보다 더 인정받는다.    


데이터의 용량과 시스템의 처리 속도를 세밀하게 측정하는 시대 속 우리는,

우리의 삶도 측정하여 숫자화 한다.     


재수했는지, 취준생 생활을 했는지, 자격증은 얼마나 땄고 그 와중에 낭비한 시간이 없었는지 계산한 후, 나이에 맞는 레벨을 달성하면 성공자라는 칭호를 내려준다.

마치, 우리의 인생도 시스템 속 데이터처럼 버그와 렉이 없이 무결점 해야 인정을 받는다.     


몇 년 전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했을 때,

번아웃이 온 나의 심리상태보다는 경제적 문제와 이력서 속 커리어를 걱정해 주시는 분이 훨씬 더 많았다. 새로운 직장을 구하느라 고단했던 인생 선배들은 새로운 곳에 취직할 때까지 무조건 버티라는 조언과 함께, 퇴사를 먼저 하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며 으름장을 놓으셨다. 덧붙여, ‘어딜 가든 회사는 다 똑같다.’는 간헐적인 믿음을 심어 주셨다.

그 믿음이 나는 절대 직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심어 주었다.     

 

평균 80세 인생 속에 정년퇴직 만 60세까지는 빈 공간이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끊임없이 커리어라는 데이터가 이력서에 기록되어야 하는 프로그램에 갇혀 버렸다.

    

0과 1 사이에서 나는 현실을 사는 것일까?

가상의 시뮬레이션 속에 사는 것일까?     


한 번쯤은 힘겹게 모은 아이템과 영광의 상처들을 내려놓고, 숨 고르기를 해보자.     


우리의 삶은 데이터가 아니니깐,

정해진 수치가 있는 건 아니니깐,     


삐뚤거리는 선이 합쳐져서 멋진 그림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계절도 알록달록하게 색칠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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