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다 줄거야

by 나무

평일 정오 12시 클럽 앞, 평소 같으면 오전 업무를 끝내고 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시간이다. 근무시간에 한가롭게 길가를 걷고 있으니, 마치 새 구두를 신은 것처럼 어색하다. 업무의 압박에서 벗어난 홀가분함과 회사에 무언가를 놓고 온 듯한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내 머릿속을 헤치고 마음속의 무거운 빗장을 연다. 핸드폰을 열어서 문자 메시지를 본다.

'오늘 12시 클럽에서 결혼식을 예정'

클럽 통로 벽에 장식된 리본 표식을 따라서 문을 열자 무대의 중심을 바라보며 둘레에 놓인 의자에 앉은 관객들이 보인다. 상현이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고, 나는 상현의 옆 의자에 앉는다.

무대에 미니 웨딩드레스를 한 진주와 턱시도를 멘 여준이 앉는다. 진주는 기타를, 여준은 건반의 음정을 조절한다.

여준: 저희 결혼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될 예정이고요. 자유롭게 즐기다가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곡은 ‘나랑 결혼해줄래’입니다.

무대는 그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오래된 친구사이에서 우연한 계기로 사랑을 했고, 매운 것을 좋아하는 입맛이 닮아서 결혼을 결심했으며, 동동이와 행복하게 살겠다는 다짐으로 채운다. 결혼식이라기엔 흥겹고 콘서트라기엔 초라한 그들의 무대가 달아오른다. 상현이 캠코더를 들고 무대 앞으로 다가간다. 결혼식 하객은 젊은 사람들뿐, 가족과 친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웨딩홀이면 필수 조건인 화려한 상들리제도, 붉은 레드카펫도 어디에도 없다.

결혼식이 끝나고 상현과 종현, 그리고 나는 무대 위를 정리한다. 붙여놓은 리본을 떼고 여기저기 흩어진 부스러기를 치운다. 의자를 원래 위치로 돌려놓자 모두 무대 위에 걸쳐 앉아서 한숨을 돌린다. 여준과 진주는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손을 잡고 나온다. 이제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 둘의 얼굴에는 수줍은 소년 소녀처럼 부끄러움이 묻어 나온다.

여준 : 이제 신혼여행 가야지

종현 : 우리가 따라가는 게 맞냐? 둘이 가면 안 돼?

진주 : 안 오겠다고? 니 신혼여행 때 따라간다.

종현 : 알았어, 갈게~ 둘이 오붓하게 보내지, 왜 우리까지 가야 해?

종현의 푸념 끝에 진주가 한마디 뱉는다.

진주 : 심심해

모두의 표정에 얼이 빠진다. 진주가 마지막 필살기로 귀여운 표정을 짓자 다들 못 볼 것을 본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여준 : 그냥, 가자.

나는 그들 무리에 끼어서 연식이 오래된 자동차에 몸을 싣는다. 좁은 차 안에 남자 셋은 뒷 자석에 앉자마자, 서로가 자리가 좁다며 옥신각신한다. 진주가 운전을 하고 그 옆 조수석에 내가 앉는다.

진주 : 출발한다. 조용히 해라.

뒷좌석 세 명의 남자는 갑자기 숙연해진다.

아무리 스위치를 눌러도 창문이 닫히지 않는 자동차는 걸걸한 엔진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간다. 자동차는 시내를 벗어나 외곽으로 빠진다. 강이 흐르고, 산을 넘어, 들판을 지난다. 신나게 떠들던 우리는 갑자기 숙연해지고 깊은 잠에 빠져든 남자 세 명은 서로 껴안는다.

진주 : 상현이가 고백하던가요?

나 : 네? 아니요.

진주 : 압력밥솥도 아닌데 왜 이리 뜸을 들인데,

진주의 말에 미소를 품자, 진주도 같이 웃는다.

진주 : 바로 받아주지 마요. 본인도 맘고생해봐야 짝사랑이 얼마나 서러운지 아니깐.

나는 붉게 물든 산 너머의 풍경을 본다. 하나의 봉우리를 넘으면 다음 봉우리가 보인다. 작년 가을 그와 마시던 술집, 그가 내게 했던 뜻밖에 고백, 다음날 거절, 그리고 외면, 어딘가 들어 본 듯한 흔한 남녀 연애 얘기처럼 머릿속에 잠식되어 버린다. 칼에 배인 탓에 항상 거치적거리던 상처는 어느새 흉터만 남긴 채 아물었다.


바다는 붉은 그을림으로 해를 삼키고 어둠에 잠식되어 버린 해안선을 숨긴다. 조명이 달린 횟집에 앉은 우리는 조개구이와 회를 먹는다. 술이 한두 잔 오고 가고, 말이 한두 번 교차되고, 서로의 마주 보는 눈빛이 부딪친다. 흥건하게 취한 우리들은 횟집에서 노래를 큰소리를 부르며 난동을 피웠고 주인 아주머니 타박을 피해 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앞서 나간 남자들은 여준을 바닷물 속으로 빠뜨리고 생쥐꼴이 된 여준은 복수한다며 모래사장 위를 뛰어다닌다. 종현이 스텝이 꼬인 탓에 넘어지자 여준은 종현을 끌어다가 바다 속에 넣는다.

참 신기하다. 몇 달 전 공원에서 상현의 음악을 듣고 있었을 때는 우리가 친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상현을 알게 된 순간, 무채색이었던 내 인생의 색깔이 알록달록 물들었다.

옆에서 바닷바람을 쐬던 진주가 못마땅한 듯 입맛을 다신다.

진주 : 나이가 많나 적으나 남자들이란 애야, 애!

진주는 혼잣말이 끝나자 그들을 향해 큰소리로 소리친다.

진주 : 빨리 와, 감기 걸려~

진주는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간 후, 바다 속에 뒤엉킨 두 명의 남자들을 데리고 바다 밖으로 나온다.

진주 : 우린 먼저 갈게.

남자 둘은 진주의 꾸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터트린다. 상현은 내 곁으로 와서 윗옷을 벗어 준다.

상현 : 춥지?

나 : 괜찮아.

상현 : 우리 걸을까?

바다 냄새, 습하고 차갑고 매서운 이곳, 홀로 서있던 그때처럼 마음 한구석이 시리다.

상현 : 나 물어봐도 돼?

나 : 응?

상현 : 그 사람 있잖아. 널 힘들게 한 사람, 이젠 괜찮아?

상현이 그의 존재를 묻는다. 그의 존재는 나만의 비밀, 오롯이 나 혼자만 감내해야 했던 아픔이었는데, 상현이 그를 알고 있다.

나 : 그 사람, 다른 사람이랑 잘 지내고 있고,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괜찮지.

상현이 갑자기 멈추어 서서 내 어깨에 올린 자신의 옷의 매무새를 고쳐 잡는다.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지긋이 나를 내려다본다.

상현 : 이젠 마음 정리 다 된 거야?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나는 상현을 바라보자, 상현이 씁쓸하게 미소 짓는다.

상현이 바다 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앞서 간다. 나는 그의 뒤를 밟는다. 상현의 입에서 나왔는지, 바다에서 흘러나오는지 모를 나지막한 노래가 들린다.




그대 내게 다가오는 그 모습

자꾸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감은 두 눈 뜨지 못한 거야

너를 내게 보내준걸 감사할 뿐야, 고마울 뿐야.

많이 외로웠던 거니 그동안

야위어가는 너를 보면 느낄 수 있어

너무 힘이 들 땐 실컷 울어

눈물 속에 아픈 기억 떠나보내게

내 품에서..

서글픈 우리의 지난날들을

서로가 조금씩 감싸줘야 해

난 네게 너무나도 부족하겠지만

다 줄 거야 내 남은 모든 사랑을..

많이 지쳐 있던 거야 그동안

자꾸 야위어가는 너를 보면 느낄 수 있어

너무 힘이 들 땐 실컷 울어

눈물 속에 아픈 기억 떠나보내게

내 품에서

서글픈 우리의 지난날들을

서로가 조금씩 감싸줘야 해

난 네게 너무나도 부족하지만

다 줄 거야 내 남은 모든 사랑을

서글픈 우리의 지난날들을

서로가 조금씩 감싸줘야 해

난 네게 너무나도 부족하지만..

다 줄 거야 내 남은 모든 사.. 랑을

내 모든 사.. 랑.. 을...


조규찬_ 다 줄거야




상현은 짙은 어둠이 가린 내 얼굴에서 무엇을 읽은 것일까?

아직까지 망설이고 있는 나, 어쩌면 슬픔마저 잊어버린 나를 보았을 지도 모른다.


내 마음조차 모르는 나는,

여전히 새로운 사랑이 두려운 나는,


그런 나로 인해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상현에게 입 밖으로 토해 낼 수 없는 대답을 되새김질한다.


‘나도 너를 좋아해.’

매거진의 이전글16화 사랑해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