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색 웨딩드레스는 조명으로 휘감는다. 신부 대기실 안, 왕관 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올린 언니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고 있다. 나는 언니 옆에서 조신하게 포즈를 취하자 사진사의 카메라는 빛을 터트린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화환, 결혼 축하를 알리는 문구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예비신랑의 학력과 직업의 위치를 나타낸다. 친척과 지인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지는 웨딩홀 로비 사이, 기타를 등에 매고 걸어오는 익숙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양복이 어설픈 그가 나를 알아보고 내게 손을 흔든다.
상현: 일찍 왔네, 혹시 어디서 연주하는지 알아?
나는 무대 오른편을 가리키며 손짓하자, 상현은 가볍게 손을 흔든 뒤 무대를 향해 걸어간다. 주위의 웅성거림은 식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멘트로 인해 줄어든다.
신랑의 입장으로 시작된 결혼식은 양가의 인사를 넘어 축가를 향해가고 있다. 상현의 감미로운 노래는 하객들의 혼잡한 감정들을 훔친다. 나는 그의 노래가 무사히 끝나길, 하객석에서 응원하고 있다. 그는 기타리스트답게 멋지게 곡을 마무리하고 무대에서 내려온다.
상현은 기타 케이스를 내려 놓으며 내 옆에 앉자, 결혼행진곡이 울러 퍼지면서 신랑과 신부가 팔짱을 끼고 하객들 사이로 걸어간다. 폭죽의 잔해와 꽃잎이 두 사람이 가는 길에 흩뿌려진다.
상현 : 나도 결혼하고 싶다.
상현의 나지막한 웅얼거림이 나에게 향하는 것 같아, 막연하게 설렌다. 핸드폰이 울리자 상현은 예식장 밖으로 나간다. 옆에 앉은 회사 친구 진희가 상현의 뒷 자태를 스캔한다.
진희 : 둘이 아는 사이야?
나 : 기타 선생님 이셔
진희 : 단지, 기타 선생님이야? 아닌 거 같은데?
나 : 어~ 뭐.
진희는 애매모호한 내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지, 옹알거리는 말을 삼키며 화제를 돌린다.
진희 : 그나저나 아까 화장실 갔다 오는데 김대리님 만났어. 은영이가 안 보여서 김대리님에게 은영이 왜 안 왔냐고 물어봤는데 잘 모른다고 하더라, 둘이 헤어진 거 같지?
나 : 설마, 둘이 헤어졌겠어? 곧 결혼한다고 들었는데.
진희 : 남녀 사이는 잘 모르는 거야. 그리고 보면 은영이는 언니랑 같은 팀인데도 결혼식에 안 왔잖아.
나는 고개를 돌리며, 그의 흔적을 찾는다. 그와 비슷한 체구, 그가 즐겨 입는 정장이 보이는지, 내 시선은 그를 갈망하고 있다. 웨딩홀 모서리 끝에서 그가 보인다. 다른 이와 얘기를 하는 모습, 그를 향한 내 마음이 꿈틀거린다. 그에게 다가가서 나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다. 잘 지냈는지, 그리고 그의 곁에 정말 아무도 없는지 확인 하고 싶다.
- 신랑 신부 친구 분들 앞으로 나오세요.
진희의 이끌림으로 신랑신부 옆에 줄지어 선다. 사진사가 사진기를 향해 보라는 말에도, 부케를 받는 여자에게 손뼉을 쳐줄 때도, 내 눈은 항상 그에게 고정되어 있다. 그가 나를 보는 듯 한 눈빛에, 그동안 그에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쌓았던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식사를 한 후, 상현이 잠시 자리를 비운 탓에, 나는 홀로 웨딩홀 앞에서 그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로비 끝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옛사랑의 그가 내게로 다가온다.
김대리 : 잘 지냈어?
나 : 예. 뭐, 그럭저럭요.
김대리 : 다행이네.
한동안의 침묵, 어색함, 낯선 두근거림, 어쩌면 그를 오늘 처음 만난 것처럼, 과거의 상처와 아픔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그가 내 심장을 망각시킨다.
나 : 오늘 은영이 안 와요?
김대리는 멋쩍은 듯 손으로 코끝을 스친다.
김대리 : 너한테 미안하네, 은영이와 헤어졌어.
그의 말 한마디, 간절히 듣고 싶어서 수없이 상상했던 그 말 한마디, 마음이 내려앉는다.
김대리 :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나 : 예.
김대리 : 가는 길에 내려 줄게. 내 차 타고 가.
나 : 아니에요. 그러니깐,
김대리 : 오랜만에 너랑 얘기하고 싶어.
웨딩홀 창 밖 너머로 기타를 어깨에 메고 걸어오는 상현이 보인다. 김대리의 손짓, 김대리가 가려는 방향으로 내 발을 튼다.
난 미련하다. 분명 또 그에게 버림받을 텐데,
왜 헛된 꿈을 꾸는 것일까?
그의 차 안, 그와 오랜만에 대화, 그의 눈치를 살피는 나에게 그가 묻는다.
김대리 : 남자친구 없어?
나는 차디찬 바람이 부는 매서운 겨울을 지나 겨우 가을이왔음에도 다시 오는 겨울을 피하지 못한다.
바보 같은 나, 어리석은 나, 여전히 그의 주위를 맴돈다.
나 : 없어요.
나는 그의 얼굴을 살핀다. 그가 웃음을 짓는 거 같기도 하고 곤란해하는 듯 보인다. 그가 라디오의 볼륨을 높이자 음악이 흘러나온다.
우린 서로 너무도 다른 세상에 살아 왔죠.
한 번 스쳐 지나갔을 뿐
그 후로 난 멀리서 이렇게 기다려 왔죠.
언젠가는 내 헛된 꿈이 혹 이뤄질까
날 기억이나 할까요.
내 이름조차 생각이나 날까요.
누군가 매일 그대를 위해 늘 기도해온 걸 알 까요.
그대가 난 부럽죠.
나 같은 사람 너무나 흔하겠죠.
혹시나 그대 알고 있나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아껴왔던 내 맘이 흔하게 묻혀질까 봐
단 한 번도 편지조차 못했는데
날 기억이나 할까요.
내 이름조차 생각이나 날까요.
그대는 이미 누군가에게 큰 의미라는 걸 알 까요.
그대를 사랑해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돼 버렸죠.
혹시나 그대 알고 있나요.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매일 그대의 곁에서 맴돌았다는 걸, 그대를 지켜왔었다는 걸
날 사랑하면 안돼요.
단 하루라도 그럴 수는 없나요.
허튼 생각이란 거 알지만 한 번은 말하고 싶었죠.
사랑해도 되나요.
혼자서라도 사랑하면 안돼요
허튼 생각 이란 거 알지만 한 번은 말하고 싶었죠.
그대를 사랑해요
박효신_동경
웨딩홀 입구에서 나를 기다릴지도 모르는 상현이 생각난다. 서둘러 핸드폰의 부재중 알림을 보자, 상현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에게 버림받았던 나는,
오늘 내 손으로 다른 그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