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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 May 16. 2023

아직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겠어요.

이혼가정의 아이가 사는 세상이야기




정체감이 가장 확실하게 수반되는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의 신체 속에서 편안한 느낌,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는 느낌,

 중요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것을 기대하는 내적 확신 등이다.


심심함을 달랠려고 우연히 펼쳐 든 책에서 이 문장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았던 적이 있었던가. 일생을 살며 느껴본 적 없다.     





초등학생 때였다. 여느 때처럼 집으로 돌아왔더니 짐이 포장된 박스들이 한가득이었다.     


"내일부터는 아빠가 올 거야." 

엄마가 말했다. 우리 집은 이혼가정이었다. 양육권 싸움에서 실패한 엄마(아직도 이유는 모른다)는 우리가 함께 살던 이 집을 떠나가야만 했다.

    

불과 8살. 초등학교 1학년 아이었던 나는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건지, 단순히 아빠보다 엄마가 좋았던 것인지 가지 말라며 엄마 품에서 밤새 울다 잠들었고 평소와 같은 아침이 왔다.


다른 점이라면 집 안에 포장된 박스가 여전히 한가득 있던 것. 아침부터 엄마가 대게를 쪄주었던 것.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포장된 박스와 함께 엄마의 흔적은 사라졌다.     



그리고 낯선 아빠가 왔다.     


아빠는 시골에서 버스 사업, 주유소, 건물 여러 채를 둔 할아버지 덕에 평생을 부유하게 살았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재산을 유지하고 밥벌이를 하는 데에 서툴렀다.      


아빠는 엄마와 이혼하서 나서 새로 시작한 가구공장 사업에 정신없이 바빴다. 오빠와 나를 돌봐줄 시간은 없어 보였다. 출근할때면 항상 거실 식탁에 만 원짜리 몇 장을 놓고 갔는데, 그것으로 우리는 매일 배달 음식을 고민했다.


그땐 지금같이 배달 음식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초딩들 머릿속에선 치킨, 피자, 짜장면 이상 나오지 않았다. 방학이면 하루 중 두 끼를 배달 음식으로 채워야 하니 고역이었다. 난 8살의 나이에 엄마가 차려주던 따뜻한 밥과 된장국을 그리워했다.     

     

     


우리 반엔 왕따인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엄마가 없었다. 소문으로 엄마는 도망가고 아빠와 단둘이 산다고 했다. 그 아이는 매일 황토색의 티셔츠에 갈색 바지를 입었고 머리는 놀림당하기 딱 좋은 까까머리였다. 마른 체구에 잘 씻지도 않는지 꼬질꼬질했고 아이들에게 매일 엄마가 없다고 놀림을 받았다.


나도 그 무리에 껴서 그 아이를 놀려댔다. 핑계로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도 엄마가 없는 게 들킬 것 같았다. 우리 엄마는 어딘가에 있었으니까.     


그 아이처럼 엄마가 없는 것을 티를 내지 않으려고 매일같이 씻어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가. 따돌림당할까 봐 두려웠다. 아마 당시 내겐 생존이었다. 가끔은 엄마가 간식을 만들어줬다고, 용돈을 줬다고, 놀아도 되는지 엄마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친구들에게 거짓말도 했다.     

     

그래도 엄마의 부재는 티가 났다. 하루는 친구에게 "넌 옷이 1년 전이랑 똑같네."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수치심이었을까, 서러움이었을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유년기, 나는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였다.

최선을 다한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난 방치된 아이였다.     



제대로 된 돌봄을 받기 위해 엄마와 함께 살고 싶었고 엄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썼다. 방학 때면 엄마 집에 있었는데 착한 딸로 보이기 위해, 엄마가 나를 필요로 하기 위해 노력했다. 난 고작 초등학생이었는데 가끔 엄마대신 밥을 차렸고, 청소를 했고, 편지를 썼다. 엄마는 내게 속 깊은 딸이라며 칭찬했다(나에겐 아픈 과거인데 엄마는 그때의 나는 어디 갔냐며 아직도 칭찬한다). 그리고 난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엄마에게조차 사랑을 갈구했어야 했던 나는 학령전기, 학령기, 커가면서 세상을 다 알기도 전에 사랑을 얻는 방법부터 배웠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항상 누군가가 원하는 사람이 돼야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되기도 전에 난 누군가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친구들을 웃겨주기 위해 가끔은 개그맨이 되었고 선을 넘는 장난도 서슴지 않았다. 연애할 땐 상대가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로 보이기 위해 애썼다.     

     

나의 결핍을 들키지 않으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척,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외적인 것에 집착했고,

자신을 꾸미는 거짓말에 익숙해졌다.     


버림 당한다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나는 버려지기 전에 버렸고, 아프기 전에 마음을 접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상대는 내게 "제발 솔직해져."라며 나를 싸구려 가짜 취급했다. 사실 싸구려가 맞다(다시 생각해도 나를 정말 잘 안다).


뭐가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 채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사랑받는것에 집착하며 싸구려 짝퉁 사랑을 하는, 애정결핍에 못난 것 투성이인 나는 정말 싸구려가 맞다.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모르고 일생을 방황했던 나는,

또 한 번 못나게도 그 탓을 불우했던 나의 어린 시절, 나의 가정환경으로 돌린다.      

내가 아직 길 위에서 헤매는 것은, 아직 자신을 찾지 못한 것은, 사랑과 돌봄이 가장 절실했을 시절 나는 사랑을 갈구하며 떠돌았기 때문이리라.     



한심한 나는 과거의 결핍에 갇혀서 27살이 되도록 청소년기에 끝냈어야 하는 이 과업조차 끝내지 못했다.     


이제 나는 나로 살려고 한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못났지만 스스로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 거지.     



정체성.

자신의 신체 속에서 편안한 느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것.     


정말로 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이 단어가 내 존재를 사라지게 만드는 듯하다. 대체 난 어느 시절에 정체된 것인지.     


이렇게 아픔과 마주하다 보면, 나의 결핍을 인정하다 보면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다 언젠가는 온전한 ‘내’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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