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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 Oct 03. 2023

아무것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 끝은 누가 정하는 것인지, 우리의 시간은 부족했는데.


“여기 병원인데요.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새벽 1시에 퇴근하고 3시쯤 잠들었나. 이른 아침, 전화벨이 나를 깨운다. 아빠가 있는 병원이었다.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탓에 이 전화가 무슨 의미인 줄은 잘 알고 있었다. 아빠의 심장이 멈추기 직전이라는 뜻이었다 (아빠는 이미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동의서를 작성한 상태였다).     


 먼저 샤워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급박한 상황 속 나는 평소처럼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했고 옷장에서 검은 옷을 꺼내 입었다. 검은 옷이 주는 의미는 분명하지만, 그날의 나는 본능적으로 검은 옷을 꺼내 입었다.  출근 시간, 서울의 도로는 꽉 막혀있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도착한 병원에 오빠를 정문에 먼저 내려주고 나는 주차를 했다. 서둘러 아빠에게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걸음을 옮기기 힘들었다.      


 아직, 아직이었다.          


 <임종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빈 병실에는 아빠가 산소호흡기 하나 없이 홀로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오빠가 아빠를 부르며 흐느낀다. 이미 돌아가신 후였다. 원래도 살이 없던 볼은 더욱더 수척해져 광대와 턱이 도드라져 보였다. 편안히 감은 눈은 긴 속눈썹을 덮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목이 마르니 아이스크림 좀 사 와.”라고 말할 것 같았다.     


 투병 기간 약물 때문인지, 긴 금식 기간 때문이었는지 아빠는 항상 갈증을 호소하였다. 목이 쩍쩍 갈라지는 것 같다고 다른 음식들은 모두 마다하면서도 아이스크림, 시원한 얼음이 동동 띄어진 주스는 반겼다. 빈손으로 왔던 하루는 얼른 시원한 것 좀 사 오라며 내 등을 떠밀기도 하였다. 돌아가시기 전날도 내가 사 온 아이스크림을 함께 맛있게 먹었었다. 섬망 증상이 있던 아빠는 아이스크림이 시원하다며 웃다가도 금방 내게 화를 내어 난 도망치듯 병실을 나왔었다.           


 ‘조금만 더 함께 있을걸. 그까짓 것 백번은 더 사다 줄 수 있으니 눈 뜨고 손 한 번만 잡아주세요.’ 아빠의 손을 잡아본다. 차갑고 경직되어 버린 손에 이질감을 느끼고 차가운 손 위로 뜨거운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린다. 왜 우느냐고 한번 물어볼 법도 한데 야속하게도 대답 한번 없다.



 아빠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서울의 대학병원에서는 장례식장을 빨리 정하라며 재촉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등 떠밀리다시피 이곳, 저곳에 연락해 본다. ‘그래, 이곳은 너무 바쁘겠지….’ 마음이 씁쓸하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방금 자다 깬 모습을 한 당직의가 슬그머니 병실 안으로 들어온다. 사망선고를 한다. 아빠의 인공호흡기를 떼어내고도 적어도 두 시간, 장례식장을 정하고도 한 시간이 지나서 말이다.      


 아빠의 마지막이 하찮게 대해진 것 같아 울컥 눈물이 밀려온다. 아무리 병원 환경이 바쁘다지만 이건 아니다.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그것이 곧 나를 향한 것임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어본다. 아빠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것은, 그래서 아빠를 쓸쓸히 떠나보낸 것은 누구도 아닌 나였다.          


 우리 집은 이혼가정이었기에 아빠의 장례 과정은 온전히 오빠와 나, 둘이서 해결해야 했다. 나는 고작 25살의 막 입사한 신입사원이었고 오빠는 28살의 사회생활 경험 하나 없는 백수였다. 장례식장을 가본 경험이라곤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데, 아빠의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막막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무 도움 안 되는 서로였다. 그래도 오빠가 있어 다행이었다.          


.


  아빠와의 추억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여행 한번 가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의 이혼 후 엄마와 함께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아빠와 멀어졌다. 아빠가 사업에 실패하고 형제들이 있던 고향으로 내려간 이후엔 더 멀어져 고작 일 년에 2~3번 보는 것이 다였다. 가끔 걸려 오는 전화는 어색함에 서둘러 끊어버렸었다. 이렇게나 무심하고 애교 없는 딸이었다.          


 찬란한 봄날의 4월, 새 생명을 위한 비가 땅에 뿌려졌다. 아빠의 발인 날이었다. 아빠의 몸을 눕힌 관이 뜨거운 불 속으로 들어갈 때,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외쳤다.      


“잠시만요. 아직 안 돼요,”     


관이, 아니 정확하게는 아빠의 사체가 불 속으로 들어갈 때, 애써 덮어놓고 외면하던 감정이 터져버렸다. 다신 볼 수 없는 아빠. '아빠' 이 두 단어를 입 속에 수없이 되뇌며 꺽꺽 눈물을 쏟아냈다.     



 아, 아빠와의 추억이 생각났다. 부모님의 이혼 후 처음 1~2년간 나는 아빠와 함께 살았었다. 아빠는 일요일 아침이면 라면을 끓여주었다. 쉰 김치를 함께 넣어 끓였는데 이상하게 맛있었다. 평일 저녁,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우리에게 이것저것 아무거나 집어넣은 김치찌개를 끓여주었다. 햄이며 참치며 온갖 것이 다 들어간 잡탕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맛있었다. 어느 날은 매일 같은 메뉴가 미안했는지 새로운 메뉴를 개발했다며 얼굴에 튀김가루를 뒤집어쓰고 밥을 튀기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맛있었다.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아빠는 시골로 내려온 내게 맥주를 내밀었다. 너와 술을 다 먹는다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날 아빠는 술에 취해 평소 무심하고 쌀쌀맞은 딸을 ‘나쁜 년’이라고 흘겨보다가도 ‘그래도 세상에서 네가 제일 이쁘다’라며 어느새 훌쩍 커버린 나를 어린아이 보듯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주었다. 얼큰하게 취한 우리는 달빛 아래 시골길을 나란히 함께 걸었었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사랑에 목말랐다. 아빠의 라면을, 김치찌개를, 튀김을 배불리 먹고도 항상 공허했다. 아빠의 빈자리가 나를 정서적으로 결핍된 아이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는 내게 최선을 다했었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부엌일이라곤 한번 해보지 않았던 아빠는 아내와 이혼 후 모든 살림을 도맡아 초등학생 아이 둘을 몇 년간 혼자 키워냈다. 최선을 다했지만 어린 딸은 아빠가 아닌 엄마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딸을 떠나보내던 그의 가슴은 찢어졌으리라. 이어서 찾아온 사업 실패에 그는 서울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가졌던 모든 것을 잃고 떠날 때, 그때도 그는 “아빠는 혼자가 좋아서”라 답했을 뿐이었다. 고향에 내려가서도 한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딸이 귀찮아할까 아끼고 아끼다 어렵게 전화 한 통 걸고는 서둘러 끊기 바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 한마디.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아빠의 빈자리를 원망하며 타인에게서 그 공허함을 채우려 할 때 아빠도 가족의 빈자리가 서글펐을지 모른다. 못난 내가 가정환경을 탓하며 모든 아픔을 짊어진 것처럼 부모를 원망할 때, 아빠도 사랑이 절실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아빠가 느끼던 갈증은 아이스크림, 시원한 음료 따위로 해소되지 않는 것이었다.           


 타오르는 불 앞에서 무거운 눈물을 내려놓았다. 그동안의 서러움과 미안함, 죄책감, 수치심이 뒤얽힌 눈물이었다. 늘 그렇듯 사연 많은 눈물은 전염성이 있다. 나의 옆에서 꿋꿋이 서 있던 오빠가 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운다. 그리고 그 뒤 나의 친구들이, 저 멀리 나의 엄마가, 그리고 아빠의 늙은 형제들이 흐느끼며 눈물을 훔친다. 어린 남매가 치르는 어리숙한 장례 속, 이 남매가 무너져버릴까 봐 다들 삼켜오던 눈물이었다.          



 아직 우리에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않았는데, 그 끝은 대체 누가 정하는 것인지. 아빠의 유품을 정리하다 젊었을 적 아빠의 사진을 봤다. 젊고 건강한 청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 적이냐고,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이렇게 환하게 웃고 있었느냐고 묻고 싶어 전화를 꺼내 들었다. 당장 전화해서 묻고 싶은데, 긴 통화음이 지나도 항상 그 자리에 있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통화와 문자 기록엔 여전히 나의 아빠가 존재하는데, 다시는 나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아빠의 죽음을 느꼈다.      


 아빠와 그 무엇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는데, 이 모든 허무는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상 없는 무엇을 원망한다. 아빠의 음식은 최고였다고. 사실 아빠가 너무 필요했다고. 너무 사랑해서, 더 함께하고 싶어 원망했노라고 진심 어린 고백의 순간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채워지지 않던 그의 갈증도, 나의 공허함도 조금은 나아졌으리라. 늘 그렇듯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날 나는 새벽녘에 뜬 달보다 애달프게 아빠를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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