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질문으로 소통하기

by 검둥새

우리 그룹으로 새로 배치된 신입사원들에 대한 실무 교육은 주로 내가 맡는다. 과제를 내주면, 신입사원들이 종종 과제 자체나 그 과제를 처리하는 데 필요한 지식들에 대해 묻곤 한다. 그런데 나는 물어본 것에 대해 곧바로 답을 주는 편은 아니다.

먼저 “네 생각은 어때?”, “왜 그렇게 생각했어?”를 되묻는다. 괜히 꼬아서 대답을 미루려는 게 아니다. 내가 바라는 건 한 번 더 고민해 보는 과정이다. 그 고민 속에서 나온 답과 실제 답을 비교해 보면 훨씬 오래, 훨씬 깊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다. 어떤 후배가 과제를 들고 와서 나에게 묻는다. 그럴 때 나는 일단 과제의 의도부터 짚는다. “이 과제가 왜 필요한지 알고 있어?” “실제 업무에서는 이게 어디에 쓰일까?” 오히려 내가 더 많은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그러면 후배는 당황하면서도 어떻게든 대답을 이어간다. 신기하게도 그 과정을 거치다 보면, 처음 나에게 물어보려던 문제의 답이 자연스럽게 풀려버리는 경우가 많다. 정답은 내가 준 게 아니라, 후배가 스스로 낳은 셈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방식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사용했던 ‘산파술’과 닮아 있다. 그는 자신을 ‘산파’에 비유했다. 산파는 아기를 대신 낳아주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호흡을 맞추며, 때로는 손을 잡아줄 뿐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산파술도 마찬가지다. 정답을 대신 주는 게 아니라, 시행착오라는 진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선배의 인내심과 후배의 고통이 함께 들어 있다. 답을 찾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켜보려면 나 역시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차라리 바로 알려줄까?”라는 유혹이 늘 있지만, 꾹 참고 묻고 또 묻는다. 사실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쉽지 않다. “왜?”, “어떻게?”를 거듭 물으려면, 나 자신도 사태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파술은 단순한 교육 방식이 아니라, 나 자신을 단련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산파술에는 나름의 흐름이 있다. 먼저, 상대가 “나는 안다”라고 자신하던 순간에 질문이 막히면서 “사실 나는 잘 모른다”는 깨달음이 찾아온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아이러니, 즉 무지의 자각이라 불렀다. 이어서 틀린 가설이 드러나고, 그 가설이 질문 속에서 무너지는 과정을 거친다. 마지막으로야 새로운 생각이 태어난다. 이것이 ‘출산’의 순간이다. 중요한 건, 산파가 아기를 대신 낳아주지 않듯, 스승도 정답을 대신 줄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답은 반드시 질문받는 이의 입에서 스스로 나오게 된다.

나는 후배들과 대화할 때 이 과정을 자주 본다. 정답을 묻던 사람이 내 질문 앞에서 잠시 막히다가, 조금씩 자기 생각을 정리하며 마침내 답에 도달하는 순간. 그 답은 누가 알려준 게 아니라 스스로 낳은 것이기에 더 오래 남는다.

이와 더불어 떠오른 개념이 있다. 바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대화편 『메논』에서 말한 ‘상기설’이다. 그는 인간이 배우는 것은 사실 새로운 지식을 외부에서 주입받는 게 아니라, 이미 마음속에 있던 것을 ‘상기(想起)’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메논』에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글조차 모르는 한 노예 소년을 불러 세운다. 그리고 땅바닥에 선을 긋고는 “이 정사각형의 넓이를 두 배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묻는다. 소년은 처음에 엉뚱한 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차근차근 질문을 던지자, 소년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올바른 답에 도달한다. 누구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사례를 들어 “배움이란 사실은 상기, 곧 잊고 있던 것을 다시 떠올리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 발상은 직장에서도 의미가 크다. 신입사원들은 백지가 아니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 인턴 경험, 혹은 작은 직관들이 이미 마음속에 있다. 선배의 역할은 그것을 끌어내는 ‘공급자’가 아니라 ‘해석자’, ‘자극자’에 가깝다. 그리고 상기설은 나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후배의 질문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기초 지식을 상기하게 한다. 덕분에 나는 묻게 된다. “나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얼마나 자주 망각하고 있었는가?” 후배는 단순히 배우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잊힌 지식을 깨워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산파술과 상기설이 항상 매끄럽게 맞물리지만은 않는다. 산파술은 질문을 통해 답을 이끌어낸다는 점을 강조하고, 상기설은 답이 이미 안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직장에서는 이 둘이 어긋날 때도 있다. 후배는 정말 “전혀 몰라서” 묻는 것일 수 있는데, 나는 그 안에 이미 답이 있다고 믿고 질문을 던진다. 그러다 보면 내가 너무 철학적으로 접근해서 오히려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간극 속에서 나는 늘 다시 나를 돌아보게 된다.

결국 산파술과 상기설은 후배와의 소통을 새롭게 보여준다. 가르침은 정답 전달이 아니라, 질문을 통한 상호적 깨우침이다. 선배는 질문을 던지고, 후배는 그 질문 속에서 스스로 답을 찾아낸다. 동시에 후배의 질문은 선배의 잠든 기억을 흔들어 깨운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 모두 조금씩 성장한다.

다만, 여기에 작은 부작용도 있다. 질문을 받으러 온 후배가 오히려 내 질문 세례에 시달리는 탓에… 요즘은 질문하러 오는 빈도 자체가 줄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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