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순신의 바다, 저자 황현필], 현충사 방문
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그 빛이 변했구나. 슬프고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너는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에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목숨을 부지한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함께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이미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뿐이다. 하룻밤을 지내기가 길고 길어 1년 같구나.
- 난중일기, 정유년 10월 14일
자신들의 전함에 올라탄 일본군들은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일부는 조총을 겨누고 또 일부는 일본도를 꼬나쥐고 조선의 함대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승냥이처럼 노려봤다. 옥포만에서 징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징소리에 맞추어 일본군을 향해 다가오던 조선의 전함들이 일시에 멈추었다. 그러고 나서는 조용히 뱃머리를 90도 돌려 배의 옆구리를 드러냈다. 무언가 명령을 내린 듯 대장선으로 보이는 배에서 깃발이 올라갔다. 일본군들은 대체 조선군이 뭘 하자는 것인가 하며 쳐다볼 뿐이었다. “쾅!” 그때 천지를 울리는 굉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무언가가 일본의 전함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일본도를 꼬나들고 한껏 집중하여 백병전을 준비하던 일본군들은 혼비백산했다. 조총의 사정거리 바깥에서 총알 수백 배 크기의 포탄이 자신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으니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주변의 동료들이 포탄을 맞아 머리가 으깨지고 뼈가 골절되어 쓰러졌다. 포탄을 피하면 포탄이 배의 갑판을 뚫고 밑바닥까지 구멍을 내어 바닷물이 차오르는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바다에 징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후퇴하던 5척의 판옥선은 속도를 줄였고 멀리 떨어져 있던 조선의 함대들이 일시에 속도를 내며 5척의 판옥선을 품어 안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징이 울렸다. 양옆에 포진한 조선의 함선들이 간격에 맞추어 살짝 전진하고, 반면에 중앙에 선 배들은 간격에 맞추어 조금 물러서더니 놀랍도록 우아한 학익진을 전개했다. 와키자카의 함대는 학익진을 전개한 조선 수군에게 에워싸이게 되었다. 해전에 잔뼈가 굵은 와키자카조차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학익진을 전개한 조선의 함대는 뱃머리가 아니라 배의 옆구리를 일본 전함을 향해 들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학익진에서 2척의 전투선이 튀어나왔다. 거북선이었다. 장사진을 펴며 일렬로 전진하던 일본의 주력 함대인 세키부네는 거북선과 부딪히며 그대로 바다 아래로 무너져내렸다.
정오가 되자 물살이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일본군이 순류를 타고 공격을 했고, 조선 수군은 역류에서 맞서며 몇 시간 동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명량의 물살도 이순신의 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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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살이 바뀌면서 난파된 세키부네의 잔해들이 거친 물살을 타고 일본군 진영으로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일본의 100여 척의 함선들은 떠내려오는 자기 편의 난파선들을 피하기에 급급하였다. 반면 이순신과 안위와 김응함의 판옥선은 순류 물살을 타고 빠르게 전진하면서 함포 사격을 전개하였다. 3척의 판옥선이 승기를 잡자 후방에서 구경하던 9척의 판옥선들이 용기를 얻어 합류하였다. 이제야 12 대 133의 해볼 만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해전사의 한 획을 긋게 될 노량해전은 그야말로 삼국의 에이스들이 모두 모인 전투였다. 시마즈의 부대는 일본 내에서 가장 용맹하기로 유명한 규슈의 사쓰마번의 군대였고 병력이 1만 명에 달했다. 바로 이 시마즈의 군대에게 원균이 칠천량에서 통한의 패배를 당했다. 일본의 소 요시토시의 부대는 대마도 출신들로 바다와 해전에 능한 특공대들이었다. 한편 진린의 명나라 수군 역시 요동 기병에 비해 전투 수행 능력이 훨씬 더 뛰어났던 절강성의 남병 1만 명 규모였다. 그러나 당시 해전 능력만큼은 세계 최강이라고 자부해도 손색이 없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야말로 분명 최고의 에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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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11월 19일 새벽 2시부터 시작된 노량에서의 전투는 날이 밝고도 계속되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바다가 고요해졌다. 도망갈 수 있는 일본군은 도망갔고, 그러지 못한 일본군은 모두 죽었다. 바다에는 조선과 명나라의 함선뿐이었다. 일본군 500여 척의 연합 함대는 바닷속으로 침몰했거나, 비어 있거나 부서진 채로 관음포에 정박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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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를 집요하게 공격한 조선 수군은 적선 200여 척을 불태우고 100여 척을 나포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너무 컸다.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출전했던 일본의 연합 함대 500여 척 중 부산으로 살아 도망간 함선은 50여 척에 불과했다. 조선군의 대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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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합군은 노량에서 일본의 연합 함대를 상대로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럼에도 노량해전을 노량대첩이라 하지 않는다. 이유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는 이순신만이 아니었다. 나주 목사 남유, 낙안 군수 방덕룡, 가리포 첨사 이영남, 통제영 우후 이몽구, 흥양 현감 고득장, 초계 군수 이언량 등이 목숨을 잃었다. 또 송희립과 나대용 등은 큰 부상을 당했다.
어떤 역사 속 인물일지라도 후대의 역사가가 어떤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평가 역시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예외, 즉 시대와 세태를 뛰어넘어 일관적인 평가와 찬양을 받는 인물도 있다. 우리 역사에는 세종과 이순신이 그러하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가장 훌륭한 왕은 세종대왕이고, 국난극복의 최고 영웅은 이순신이라는 이야기를 늘상 듣고 자라왔다. 역사를 들여다보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세종과 이순신은 그런 평가를 받는 것이 마땅했고, 선배 역사가들이 그렇게 관심을 갖고 연구할 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