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책을 읽는 방식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두 가지로 나뉠 것 같다. 속독과 정독이다. 속독은 빠르게 훑어보며 내용을 습득하는 것이고, 정독은 천천히 곱씹으며 이해하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이미 파악하고 있고, 어느 정도 아는 내용들로 구성된 책이라면 속독을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독을 하려고 노력한다. 아직 학식의 수준이 얕고 생각의 내공이 미천한 나로서는 대부분의 책을 정독해야 한다. 하지만 정독, '깊이 읽기'가 참 만만치 않다.
정독을 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책을 펼쳐놓고 한 문장, 한 단락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딴생각에 빠져있곤 한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면서 읽어보기도 하지만, 그러다 보면 글의 흐름이 끊기기 일쑤다. 무엇보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이해되지 않는 문단 하나하나를 되뇌다 보면 지쳐서 결국 포기해 버린다.
이렇게 벽에 막혀있을 때 꽤나 도움이 된 활동이 있다. 독서토론이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책을 가볍게 읽을 수 없다. 하지만 읽어야 하는 기한은 정해져 있다. 어려운 부분에 한없이 매달릴 수 없어 일단 넘어가면서도 전체적인 구조는 파악해야 한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깊이 파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일단 넘기되, 전체적인 맥락은 파악해야 한다.
기한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해 읽어온 결과물로 토론을 시작한다. 독서토론이 시작되면 독서와는 다른 통찰을 얻는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각자가 이해한 부분이 다르고, 각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해석도 다르다. 내가 어렵게 느꼈던 부분을 누군가는 쉽게 설명하고, 내가 단순하게 읽어 넘긴 부분에서 누군가는 깊은 의미를 발견한다. 이렇게 서로의 이해가 만나고 부딪히면서 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한스 가다머의 해석학에는 '지평'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지평'은 나라는 존재가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 한계와 범위다. 하지만 이 '지평'은 유동적이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하는데 새로운 경험이나 지식의 확장, 다른 관점을 만나면서 기존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지평과 지평이 만나 새로운 이해가 만들어지는 것을 '지평융합'이라고 한다.
책 역시 지평을 가지고 있다. 독서를 하는 나라는 존재가 해석할 수 있는 범위가 책의 지평이 된다. 책을 나름의 방식으로 정독하게 되면서 나의 지평이 텍스트가 가진 지평과 만나 새로운 이해가 창출된다. 나의 지평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의 지평과 만나 또 다른 이해가 창출된다. 시간이 지나 다시 같은 책을 펼치더라도 이전과는 다른 나의 지평이 보다 넓어진 책의 지평과 만나 '지평융합'이 발생한다. 마치 책과 내가 끝나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독서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다. 끊임없는 대화이자 성장의 과정이다. 책과의 대화, 다른 이들과의 대화,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변화한 자신과의 대화. 이런 대화들이 나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주고 있다. 여전히 정독은 쉽지 않고, 깊이 읽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새로운 이해가 만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성장한다. 새로운 지평과의 만남을 기대한다.
...라고 거창하게 얘기했지만 스스로 부끄러운 점이 많다. 내 지평은 확장 없이 정체된 지 오래인 것 같다. 독서토론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