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오래전 이야기다. 독서토론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발제문 난이도가 상당했다. 책 자체는 그렇게 깊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질문의 내용은 상당히 난해했고 그 수도 적지 않았다. 당시의 나로서는 꽤나 머리를 싸매야 했다.
발제자도 난감해했다. 자신이 직접 발제한 것이 아닌, 해당 책에 지정된 발제 목록에서 일부를 뽑아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토론을 시작하면 입을 먼저 떼는 사람이 드물었다. 토론은 어떻게든 진행은 되었지만, 시간 내에 발제문을 끝내기에 급급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이 늘어갔고, 생각을 나누는 즐거움은 점점 사라져 갔다.
꽤나 힘겨웠던 그 모임이 끝나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새로운 독서토론 모임에 참여했다. 이전 모임과는 정반대였다. 발제문 내용이 그저 감상을 묻는 수준이었는데, 모임이 시작되면 그마저도 아예 내팽개치는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신선했다. 이전 모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적극성이 보였다. 다들 나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였다. 토론이 아니라 그저 대화의 장, 공감의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같이 참여했던 친구는 "미드에서나 보던 단체 심리 상담 같다"고 표현했다.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다."
칸트의 말이다. 칸트는 이 말로 당시 대립하던 두 철학 사조를 통합하려 했다. 이성만을 강조하는 합리론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한 이론이 되기 쉽고, 경험만을 강조하는 경험론은 체계 없는 관찰의 나열에 그치기 쉽다는 것이다. 결국 인식은 이성이라는 형식과 경험이라는 내용이 만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결국 두 모임 모두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발제문이라는 형식은 대화의 방향을 잡아주는 지도가 되어야 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생각은 자유롭게 흘러야 한다. 너무 엄격한 형식은 대화를 막고, 형식의 부재는 대화를 방황하게 만든다. 이 둘의 균형이 맞았다면 꽤나 괜찮게, 오래 지속되는 모임이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