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직장인의 의미

by 검둥새

"그 녀석, 열심히 하잖아. 한 번 잘 키워봐."
팀장님의 목소리였다. 음료수나 하나 뽑을까 하여 라운지의 자판기로 가는 길에 우연히 들은 목소리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녀석이 나를 가리킴을 알았다. 그리고 이어서 파트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심히는 하는데, 허술한 부분이 많아서..."
설마 내 얘기야 싶어서 조금 더 들어보다가 내 이름까지 확실히 거론된 순간 자리를 떠버렸다.

팀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전후 맥락은 금방 파악되었다. 업무가 과중되고 있어 인력 투입이 시급한 핵심 업무가 있었다. 회사의 가장 핵심 업무에 속하는 일이라 그 일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나름 능력을 인정받는 일이었다. 당시 막내급이었던 내가 제법 열심히 하는 모습을 봐둔 팀장님은, 그 업무에 나를 투입시키고 그 업무의 핵심으로 키우는 게 어떠냐고 제시한 거였다.

좀 더 실무자에 가까우면서 그 업무를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파트장님의 의견은 달랐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있음을 알고 있고 평소에도 종종 칭찬해 주었으나, 은근 많이 해온 내 업무 실수를 직접 봐온 사람이었다. 파트장님은 그 중요한 업무를 나에게 맡기기에는 못 미더웠던 모양이다. 파트장님에 대한 신뢰가 깊었던 팀장님은 결국 그 제안을 없던 일로 하였다.

순간 울컥하긴 했으나 자리로 돌아온 시점에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파트장님의 말을 인정했다. 맞는 말이다. 아직 자잘한 업무 실수도 많이 하고, 한 번은 업무에 큰 구멍이 생겨 이를 메꾸느라 파트장님이 크게 고생하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를 그 중요한 업무에 투입시킬 리가 없지 싶었다. '맞는 말이지' 하며 쿨한 척 하긴 했는데 그래도 상처는 받았나 보다. 이후에 나는 허술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꽤나 노력했다. (그래도 여전히 자잘한 실수를 많이 했다. 나라는 사람의 성향을 극복하는 것은 힘든 일인가 보다.)

이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다. 이런 일은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직장에서는 크고 작은 평가와 관찰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한 번은 파트에서 업무적인 문제들이 좀 발생할 때마다, 내 일이겠거니 하고 별생각 없이 처리해 놨더니, 선임 한 분이 나를 '조용한 해결사'라고 평가해 준 적이 있었다. 한동안 그 평가에 맞춘 컨셉을 잡기 위해 노력 좀 했었다. 다른 파트의 동료가 "너네 후배 방치 좀 하지 말고 신경 좀 써라"라고 하니 내가 도와줄 건 도와주되 가장 기본이 되는 건 개인의 태도에 달린 문제라고 반박하며 신경 안 쓰는 척했으나, 그때부터 은연중 잔소리도 늘어났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내가 영향을 받고, 내 잔소리에 후배들도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며 살고 있다.

직장이라는 공동체에서 나는 주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분석당한다. 나 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분석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나는 자꾸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한다. 팀장님 앞에서는 더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려 한다. "네, 해보겠습니다!"라고 힘차게 대답하고,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제안하며, 약간의 도전 정신까지 내비친다. 파트장님 앞에서는 더 신중하고 꼼꼼한 모습을 보이려 한다. "한번 더 검토해 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세부사항을 꼼꼼히 체크하며,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한다.

후배들 앞에서는 또 다른 나가 등장한다. 든든하고 경험 많은 선배의 모습을 연출하려 한다.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하는 게 좋아"라고 조언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 동료들 앞에서는 또 다른 얼굴이다. 경쟁적이면서도 협력적이어야 하고, 자신감 있으면서도 겸손해야 한다. 심지어 같은 동료라도 누구냐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나를 보여준다. A동료 앞에서는 좀 더 진지하고 성실한 면을, B동료 앞에서는 좀 더 유머러스하고 편안한 면을 강조한다. 왜 그럴까? 나는 왜 온전한 나 자신을 보여주지 않고 '연기'를 하고 있을까?

이런 '연기'를 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멈출 수 없다. 팀장님과의 미팅에서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아, 지금 내가 연기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연기를 멈출 수가 없다. 아니, 멈춰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팀장님이 원하는 건 바로 이런 모습이니까. 파트장님 앞에서 신중한 척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 좀 오버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 파트장님은 그런 내 모습을 더 신뢰하는 것 같다. 그러면 이게 연기인가, 아니면 진짜 나인가?

더 혼란스러운 건, 이런 모습들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에게는 정말로 열정적인 면도 있고, 신중한 면도 있다. 든든한 면도 있고, 경쟁적인 면도 있다. 다만 상황에 따라 어떤 면을 더 강조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건 연기가 아니라 적응인 걸까? 아니면 생존 전략인 걸까?

문제는 이런 상황이 때로는 무겁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회의실에서 발표를 할 때를 생각해 보자. 앞자리에 앉은 임원들의 시선, 옆자리 동료들의 시선, 뒷자리 후배들의 시선이 모두 다르게 느껴진다. 임원들은 '이 사람이 회사에 도움이 될까?'라는 시선으로, 동료들은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텐데'라는 시선으로, 후배들은 '선배는 역시 다르구나' 또는 '별거 아니네'라는 시선으로 나를 본다.

이 모든 시선을 의식하다 보면, 정작 발표 내용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일까?', '저 표정은 무슨 의미일까?', '내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릴까?'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 순간 나는 발표하는 주체가 아니라, 평가받는 객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가 나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le regard d'autrui)'을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자신이 '객체'가 되는 경험을 한다. 평소에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다. 내가 사물들을 관찰하고, 판단하고, 선택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 사람이 바라보는 '객체'가 된다.

사르트르는 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내가 공원에서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다고 하자. 그 순간 나는 완전한 '주체'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 뛰어노는 아이들, 산책하는 개들을 내가 바라보고 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펼쳐진 풍경이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이 뒤바뀐다. 이제 나는 그 사람의 시선 속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는 객체가 된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왜 여기 앉아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가 그 시선의 주인에 의해 해석되고 판단된다.

이런 순간을 사르트르는 '대상화(objectification)'라고 불렀다. 나는 더 이상 자유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의식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의식 속에서 분석되고 범주화되는 '사물'이 되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일이 실제로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있을 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스스로를 객체화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이 나를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를 상상하며 행동한다.

직장에서는 이런 일이 더욱 빈번하고 복잡하게 일어난다. 나는 팀장님의 시선 속에서 '열심히 하는 부하직원'이라는 객체가 되고, 파트장님의 시선 속에서는 '아직 미숙한 신입'이라는 객체가 된다. 후배들의 시선 속에서는 '따라야 할 선배'가 되고, 동료들의 시선 속에서는 '경쟁 상대'가 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핵심은, 이런 대상화가 피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본질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마주치는 순간 필연적으로 서로를 객체화한다. 내가 상대방을 '팀장', '동료', '후배'라는 범주로 이해하는 것처럼, 상대방도 나를 어떤 범주 안에서 이해한다.

사르트르는 이런 경험을 '수치심(la honte)'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수치심은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단순한 부끄러움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내가 열쇠구멍으로 다른 사람의 방을 엿보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몰입해 있다.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고, 나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급작스럽게 '엿보는 사람'이라는 객체가 된다.

이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수치심이다. 이는 단순히 '잘못된 행동을 들켰다'는 도덕적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바로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 속에서 어떤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는 자각에서 오는 실존적 당황감이다.

내가 자판기 앞에서 느꼈던 그 묘한 기분도 이와 같았다. 팀장님과 파트장님의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갑자기 '평가받는 직원'이라는 객체가 되었다. 그 순간 느꼈던 것은 단순한 서운함이나 분노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들의 판단 속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해버렸다는 충격이었다.

수치심은 또한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평소에 나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트장님의 시선에서 나는 '허술한 사람'이었다. 이 두 인식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혼란, 그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수치심의 본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수치심이 꼭 부정적인 평가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가 나를 과도하게 칭찬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타인의 시선 속에서 만들어진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 사이의 괴리를 느끼게 된다.

직장에서 이런 수치심은 일상적으로 경험된다. 승진 발표에서 내 이름이 빠졌을 때, 회의에서 내 의견이 무시당했을 때, 반대로 예상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순간에서 나는 '타인의 시선 속의 나'와 마주치게 되고, 그 충격을 경험한다.

문제는 이런 객체화가 '갈등'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나는 주체로 살고 싶어 하지만, 타자의 시선은 나를 객체로 만든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을 객체로 볼 때, 그 사람은 자신의 주체성을 잃는다. 사르트르는 이를 "타인은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라는 유명한 말로 표현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런 상황이 절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타자의 시선이 나를 객체로 만들지만, 그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여전히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의 핵심이다.

10년 전 그 자판기 앞에서, 나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파트장님의 평가에 분노할 수도 있었고, 좌절할 수도 있었고, 아예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평가를 받아들이고 더 나은 모습이 되기로 선택했다. 그것도 하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지 선택하는 자유'다. 타자의 시선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시선에 어떻게 대응할지, 그 시선을 통해 어떤 나를 만들어갈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팀장님이 나를 '열정적인 사람'으로 본다면,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열정적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그런 기대가 부담스러워서 의도적으로 차분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파트장님이 나를 '신중해야 할 사람'으로 본다면, 나는 정말로 더 신중해질 수도 있고, 때로는 과감한 모습으로 그 인식을 깨뜨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선택이 '나'를 만들어간다는 점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것의 총합"이라고 했다. 타자의 시선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나를 창조해 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직장에서의 다양한 페르소나들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그것들이 단순한 '연기'나 '위선'이 아니라, 각각의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나다운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다. 팀장님 앞에서의 열정적인 나, 파트장님 앞에서의 신중한 나, 후배들 앞에서의 든든한 나... 이 모든 모습이 가짜가 아니라, 내가 그 순간 선택한 진짜 나의 일부일 수 있다.

물론 이런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과는 내가 감당해야 한다. 타자의 시선을 핑계로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든 순간에서 나는 선택하고 있고, 그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다.

결국 사르트르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타자의 시선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롭다. 매 순간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될지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택들의 연속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다.

지금도 나는 매일 선택한다. 수많은 시선들 속에서 어떤 나로 존재할 것인지를. 때로는 타자의 기대에 맞춰가기도 하고, 때로는 내 방식을 고집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워한다.

결국 직장인이란, 수많은 시선들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존재인 것 같다. 완성된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매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존재. 그것이 직장인의 숙명이자, 어쩌면 가능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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