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의미

by 검둥새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룹원들을 회의실로 불러 모은 그룹장님의 말이었다. 이 짧은 한마디가 끝나자마자, 방 안의 공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몇 달 동안 우리를 괴롭히던 대형 프로젝트가 드디어 끝난 순간이었다. 긴장이 풀린 사람들의 어깨가 눈에 띄게 내려앉았고, 누군가는 모처럼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마음속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정 압박, 끝없는 야근, 주말 근무. 프로젝트 막바지에는 집과 회사를 오가는 것 외에는 삶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눈을 떠서 출근하고, 회사에서 쓰러질 듯 퇴근해 잠드는 생활. 반복되는 하루가 마치 자투리 없는 긴 필름처럼 이어졌다. 동료들과 나눈 대화도 늘 비슷했다. "오늘도 야근이지?" "얼마나 남았어?" "이거 또 수정이래." 짧고 건조한 문장들, 그러나 그 안에 서로에 대한 연민과 연대가 스며 있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들 하시고, 쉬실 분들은 쉬시고, 가볍게 한잔 걸치실 분들은 적정선에서 법카 긁고 올리세요."
그룹장님의 농담 섞인 말에 방 안이 순간 활기를 띠었다. 다들 좋아하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세 명은 자리에 남았다. 그룹장님, 그리고 각 업무 관리 담당자 두 명이었다.

"일단 이번 프로젝트는 간신히 마무리되긴 했는데, 일정이 지연되는 바람에 바로 다음 프로젝트 들어가야 하는 거 알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막상 듣자 허탈함이 몰려왔다.

"아니, 일정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애초에 빡빡하게 할당해 놓고 알아서 맞추라고 하는 건 좀…"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룹장님은 적당히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답했다.
"미안하다. 위에서도 난리라서 드러눕기도 힘들다. 그래도 프로젝트 초반은 조금 여유 있을 테니 눈치 보면서 쉬라고 전해줘."

회의가 끝나자 모두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묘한 허무가 밀려왔다. 몇 달간 쏟아부은 땀과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성과를 냈는데도, 성취감보다는 "또 시작이구나" 하는 무게가 더 크게 다가왔다. 끝냈다는 안도와 다시 시작이라는 허무가 동시에 찾아오는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직장인의 일은 이렇게 반복된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끝내면 또 다른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보고서를 마치면 또 다른 보고서가 주어진다. 성과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금세 초기화된다. 몇 달의 고생이 '종료'라는 단어와 함께 한순간에 정리되고, 그 자리에 곧바로 '착수'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직장에서의 일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상황은 고대 신화 속 한 장면과 닮아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인물 시지프스는 교활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속여 인간들이 한동안 죽지 못하게 만들었고, 저승의 왕 하데스를 농락하기도 했다. 심지어 올림포스의 신들을 기만해 자신의 왕국을 유지하려 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들과 맞서려 한 그의 교만은 결국 신들의 분노를 샀다.

신들은 그에게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죽음이나 고통으로 끝나는 단죄가 아니라, 끝없는 반복이라는 형벌이었다. 시지프스는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야 했다. 그러나 바위는 정상에 이르기 직전 반드시 굴러 떨어졌다. 그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야 했고, 다시 같은 바위를 굴려야 했다. 이 작업에는 완성도, 성취도, 해방도 없었다. 그저 무의미한 노동의 반복뿐이었다.

이 형벌의 잔혹함은 그 끝없음에 있다. 그는 매번 정상에 거의 도달하지만, 결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순간의 성취가 손끝에서 흩어지고, 남는 것은 허무뿐이다. 결국 시지프스는 영원히 바위를 굴려야 하는 운명, 즉 무의미와 반복의 상징이 되었다.

직장인의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프로젝트를 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곧 다음 프로젝트가 기다린다. 매번 보고서를 완성해도, 곧 다른 보고서가 책상 위에 놓인다. 우리는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지만, 그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진다.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스 신화』에서 이 장면을 단순한 벌 이야기가 아니라 삶 전체의 은유로 읽어냈다. 카뮈가 보기에 인간은 본성적으로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하지만 세계는 언제나 이 질문에 침묵한다.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이 간극, 즉 의미를 찾고 싶은 인간과 의미를 주지 않는 세계 사이의 모순이 바로 카뮈가 말한 *부조리(absurde)*다.

부조리는 단순히 “인생이 허무하다”는 진술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분명히 의미를 원하지만, 세계는 끝내 그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오는 긴장이다. 카뮈는 이 부조리를 직시하는 것이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자살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왜 계속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이 그의 철학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카뮈의 답은 의외였다. 그는 부조리 앞에서 절망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그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고 했다.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되, 그 무의미함 속에서 오히려 자기만의 태도로 삶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맥락에서 카뮈는 시지프스를 불행한 인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시지프스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왜 그럴까?
시지프스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지금 당장 들인 힘이 곧 허무하게 무너질 것을. 자기 노동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춘 적도 없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지 않는다. 또다시 바위를 붙잡아 천천히 밀어 올린다. 어쩌면 그는 바위의 무게 속에서, 무너짐을 아는 그 순간 속에서 오히려 자기 존재를 더 선명히 느낀다. “나는 지금 이 바위를 밀고 있다.” 그 사실만큼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우리는 흔히 결과로만 나를 증명하려 한다.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는가, 성과표에 몇 점을 받았는가, 승진 명단에 이름이 올랐는가. 하지만 카뮈가 보여주는 시지프스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성취라는 결과가 눈앞에서 흩어져도,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그 짧은 순간마다 그는 스스로의 선택과 태도를 확인한다. 무너진 성과가 그를 정의하지 못한다. 오히려 다시 바위를 붙잡는 행위 속에서, 그는 자신이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카뮈가 말하려는 건 거창한 낙관도, 억지로 의미를 찾으라는 강요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는 결과가 무너지고, 세상이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끝까지 직시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나는 내 삶을 이렇게 살아가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작은 순간, 그 태도에 주목한다.

바위는 매번 굴러 떨어진다. 우리의 보고서도 반려되고, 성과도 곧 잊히고, 내년 목표가 다시 주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력한 존재는 아니다. 다시 시작하는 그 순간, 여전히 나에게는 선택지가 남아 있다. 불평하면서도 붙잡을 수 있고, 체념 속에서도 붙잡을 수 있고, 혹은 묘하게 웃으며 붙잡을 수도 있다. 어떤 태도로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릴지는, 끝내 나의 몫이다.

그래서 카뮈는 말한다. 시지프스는 불행만이 아니라, 어쩌면 행복한 사람일 수 있다고. 역설 같지만, 무너짐을 알면서도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그 순간, 그는 단순한 벌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내는 인간이 된다. 의미 없는 노동 속에서 오히려 작은 의미를 발명해 내는 자유, 그것이 카뮈가 본 시지프스의 얼굴이다.

직장인의 하루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보고서를 완성했다고 안도하는 순간, 다시 새로운 양식이 떨어지고, 겨우 마무리한 프로젝트 뒤에는 곧바로 다음 과제가 기다린다. 성과 발표가 끝나면 잠시 환호가 울리지만, 이내 또 다른 목표가 설정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흘린 땀과 시간은 종종 너무 빨리 잊힌다.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우리의 성과도 정상에 닿기 무섭게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반복되는 일상에 직장인들은 허무함을 느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시지프스가 다시 바위를 붙잡는 순간과 닮아 있다. 무너지는 걸 알면서도 바위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 운명, 그러나 동시에 그 태도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 우리도 마찬가지다. 결과가 허무하게 사라져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회의실로 들어가 발표를 준비하고, 동료와 머리를 맞댄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시스템에 굴복하는 객체가 아니라,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내는 주체가 된다.

돌아보면 나의 일도 그와 같다.
성과급은 줄었지만, 그 과정을 함께 견뎌낸 동료와의 신뢰는 남았다.
보고서는 결국 반려되었지만, 그 덕분에 내 표현 방식은 한층 다듬어졌다.
야근이 끝나고 허무하게 집에 돌아가던 길, 동료와 나눈 "그래도 해냈네"라는 한마디는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았다.

이런 순간들은 KPI나 평가표에 기록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게는 분명히 남는다. 결과가 허무하게 무너져도,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얻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반복을 버틸 작은 힘이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동료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이 반복에 맞서고 있다. 어떤 이는 냉소적으로 농담을 던지며 견디고, 어떤 이는 “다 배우는 거다”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또 어떤 이는 체념한 듯 묵묵히 업무를 이어가지만, 그 안에서도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 애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태도로 바위를 밀고 있다.

카뮈는 말한다. 부조리를 직시하는 것이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시작이라고. 의미 없는 세계 속에서도, 나는 나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 일도 마찬가지다. 성과가 늘 사라지고,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진다. 그러나 그 허무를 알면서도 나는 다시 바위를 민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일이란 성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성과는 언제든 사라진다. 오늘의 결과는 내일 새로운 과제로 덮여버린다. 하지만 일은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 바로 그 반복 속에서 내가 어떻게 서 있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은 무너지는 결과가 아니다.
일은 곧, 무너짐을 알면서도 다시 반복하는 나의 태도다. 일의 의미는 무너지는 성과에 있지 않다. 그 무너짐 속에서도 다시 반복하는 나의 태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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