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의 의미
10여 년 전, 나는 신입사원이었다. 신입사원 교육이 한창이던 시기, 인사팀 직원이 내 이름이 적힌 봉투를 내밀었다. 첫 연봉 계약서였다. 종이를 꺼내 들자,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기대보다 크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마음에 쏙 드는 액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감정은 복잡했다. 실망이 섞여 있었지만, 동시에 안도감이 있었다. 취업 문이 좁아 숨 막히던 시절, 겨우겨우 통과해 들어온 이 회사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증거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서류 끝에 사인하면서, ‘그래, 일단 열심히 해보자’라는 다짐이 따라왔다. 그 숫자는 곧 내가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첫 순간이었다.
몇 해가 지나, 조금은 일에 익숙해졌을 무렵. 나는 꽤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다. 주어진 일을 처리하기 위해 새벽 일찍 출근했다. 밤늦은 시간까지 붙들고 있었다. 잠시 바람 쐬는 시간마저 아까워했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채운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인사고과를 받을 때는 은근히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평균’. 특별히 낮은 것도 아니지만, 기대했던 ‘상위’는 아니었다. 순간 허탈감이 밀려왔다. ‘이 정도면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이내 곧 위안을 삼았다. 나보다 능력 있는 선배들도 열심히 하는데, 내가 거기까지 닿으려면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인정받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좀 더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지. 그러나 그 허탈감은 오래도록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열심히 해도 늘 평균일 수 있다는, 인정과 성과 사이의 묘한 간극 말이다.
적당히 1인분으로서의 능력은 하게 되었다. 대형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몇 달 동안 쉼 없이 달렸고 마침내 끝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야근과 주말 근무, 함께 무너져가던 동료들의 표정, 집보다 회사에 더 오래 머물던 시간들. 그렇게 겨우 마무리했을 때의 첫 감정은 안도였다. 하지만 곧 따라온 건 허무함이었다.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그것이 매출로 이어지기까지는 몇 달의 텀이 있었다. 당장 회사에서 내놓는 성과 지표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보고서 한 장과 잠시의 축하 인사만을 남긴 채, 우리는 바로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갔다. 열심히 했지만 아무도 크게 기억하지 않는 듯한 공백.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돌이켜보면, 연봉 계약서에 적힌 숫자도, 평균이라는 인사고과도, 허무하게 끝난 프로젝트도 모두 나를 흔들었던 건 같았다. 그 중심에는 항상 인정이 있었다. 회사가 나를 얼마만큼 인정하는지, 동료가 나의 노력을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성과란 결국 이런 인정의 문제와 얽혀 있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은 혼자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스스로 ‘나는 나다’라고 되뇌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짜 문제는 타인의 승인이다. 누군가 나를 자유로운 주체로 인정해 줄 때, 비로소 내가 나라는 사실이 현실이 된다. 그는 이 과정을 ‘인정투쟁’이라고 불렀다.
인정투쟁이라는 말은 다소 거칠게 들리지만, 직장 생활 속에서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신입사원 시절 연봉 계약서에 사인할 때도, 몇 년 뒤 평균이라는 고과를 받을 때도, 대형 프로젝트가 끝난 뒤 공허함을 느낄 때도, 결국 내가 갈망했던 건 인정이었다. 회사가 나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동료가 내 노력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성과란 결국 이 인정투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주인은 노예로부터 인정받지만, 그것은 공포에 의한 복종일 뿐 자유로운 승인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주인의 인정은 공허하다. 반대로 노예는 복종 속에서도 노동을 통해 세계를 바꾸고, 자기 흔적을 남기며, 오히려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직장에서의 성과도 이와 닮았다. 억지로 쥐어진 평가와 숫자는 공허하게 다가오지만, 내가 몸으로 부딪치며 만들어낸 경험과 흔적은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든다.
결국 성과는 숫자가 아니라 인정의 형식이다. 회사의 인정, 동료의 인정, 그리고 나 스스로의 인정이 서로 맞물려야 비로소 성과는 의미를 가진다. 헤겔이 말한 인정투쟁은, 내가 매번 연봉 계약서 앞에서, 고과 결과 앞에서, 프로젝트의 끝자락에서 부딪치던 그 갈망과 허무, 그리고 자부심을 설명해 주는 언어였다.
성과에는 언제나 두 얼굴이 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성과다. 매출, KPI, 승진, 연봉 같은 것들. 회사가 나를 얼마나 쓸모 있는 인력으로 평가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이런 성과는 너무나 직접적이다. 숫자와 등급으로 남아 곧바로 내 연봉과 직급, 커리어에 반영된다.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성과를 얻기 위해, 더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인정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이 눈에 보이는 성과만으로는 늘 어딘가 공허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평균이라는 평가로 돌아올 때, 내가 진짜로 승인받았다는 감각은 오지 않는다. 강제로 쥐어진 점수는 헤겔의 주인이 노예에게서 얻은 공허한 인정과 닮아 있다. 숫자는 남았지만, 그 안에 내 주체성은 담겨 있지 않은 듯하다.
다른 한편,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도 있다. 보고서에는 적히지 않지만, 차곡차곡 쌓이는 기반지식. 위기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힘.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관계, 협력과 신뢰. 이런 것들은 눈앞의 지표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헤겔이 말한 노예의 노동처럼, 당장은 주목받지 않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내 흔적을 만들고 스스로를 발견한다. 이 성과는 외부의 인정이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에게 내리는 승인이다.
문제는 두 가지 성과를 동시에 챙겨야 한다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몰두하면 공허해지고, 보이지 않는 성과만 붙들면 현실적인 보상을 놓치게 된다. 직장인은 결국 이 두 층위를 함께 짊어지고 간다. 그런데 이걸 다 챙기려면 너무 벅차지 않은가?
여기서 헤겔이 말한 상호인정이라는 힌트가 나온다. 주인–노예의 모순은 강제된 인정으로는 자기의식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짜 인정은 자유로운 주체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이 통찰을 직장에 가져오면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내가 회사의 목표와 방향을 인정하고, 동료들의 노고와 가능성을 존중하며, 동시에 내 안의 가능성도 존중할 때, 성과는 억지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쌓인다. 눈에 보이는 성과와 보이지 않는 성과가 서로를 지탱하며 함께 따라온다.
성과의 의미는 결국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인정은 회사의 점수나 동료의 칭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 안에서 스스로를 승인하는 경험까지 더해져야 한다. 성과는 내가 세계 속에 남긴 흔적이고, 동시에 타인의 자유로운 승인 속에서 완성되는 상호인정의 형식이다.
성과는 결국 인정받는 일이다. 회사의 지표라는 외적인 승인, 동료들의 자발적인 승인, 그리고 내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내적인 승인. 이 세 가지가 맞물릴 때 비로소 성과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성과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내가 세계 속에 남긴 흔적이자, 타인과 함께 확인한 존재의 증거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과는 결코 혼자서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이다. 연봉 계약서도, 인사 고과도, 프로젝트의 성취도 결국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났다. 누군가 나를 평가하고, 협력하고, 때로는 무시하기도 하면서 성과는 형성된다. 성과의 의미를 묻다 보면 결국 우리는 관계의 문제에 다다른다. 그리고 관계는 곧 소통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