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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섬 Aug 20. 2016

<새벽 두시 전화벨> 11화

기억의 왜곡

전 직장에서 관둘 때 사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한 나의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저자세로 설설 기면서 사정사정 해서 받았다. 싸워봤자 무슨 소용이냐, 그냥 받고 치우는 게 나은거 아니냐고 나 자신을 기만하면서, 비겁하고 용기없는 나 자신을 눈감으면서 그렇게 받아냈고 그렇게 그만두었다.     


그 다음날부터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 자신을 기만하고 눈은 감았을지는 몰라도 용서는 하지 못했다. 밤마다 나 자신의 비겁함이 떠오르고 무력한 내가 미웠다.     


비겁하고 용기없고 무력한 사람이 그날의 충격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겠는가. 나는 내가 할 말은 하고 나온 것처럼, 쩨쩨한 인간들에게 그들의 그릇을 참교육 시킨 것처럼 상상했다. 상상은 점점 더 디테일 해지고 상상속의 내가 내뱉는 문장들도 더 정교해졌다. 똑같은 상황에 내가 또 놓인다면 그때는 이렇게 해야겠다, 라는 헛된 다짐과 함께. 헛된 다짐과 나의 정신승리가 합쳐지자 내 머릿속에서 그날의 비겁한 나는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만족스럽게 잠이 들었다.     


기억은 마치 좀비같다. 느릿느릿, 내가 부지런히 생각하고 있을 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생각을 멈추면 어느새 내 뒤를 쫓고 있다. 기억에게 생포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슬프고 아픈 기억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는 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좀비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 달리는 동안엔 좀비가 쫓아오지 않지만 주인공의 숨이 차올라 멈추면 좀비는 어느새 목덜미를 물어버린다. 해결책은 단순하다. 좀비를 죽여버리는 것. 즉 그날의 기억을 내 머릿속에서 재구성 하는 것.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상상속의 나를 현실의 나와 동일시 하면 어느새 현실의 내가 상상속의 나를 닮아간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모멸감을 견디던 나보다 지금의 나는 조금 더 내 상상속의 나와 닮아있다. 할 말은 하고 어이없어 보이는 말은 일축하고 타인으로부터 덜 상처받는 나.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 보다 조금은 더 강건한 사람인 것 같다.

        

(by TEAM "PLAN S", 글: 서은호 / 그림: 한섬)

<새벽 두시 전화벨> 11화 - 기억의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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