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수술

by 김지은

나에겐 허리수술의 경험이 있다. 21살 겨울즈음이었던 것 같고 내 생일즈음이었으니까 1월 초 중반에 해당이 될 것 같다. 이전 글에도 적은 바 있지만, 어릴때부터 선천적인 영향으로 혹은 스트레스나 어떤 심리적인 부분에 의해서도 몸의 한 부분에 데미지를 받거나 영향을 받는다는 담당 의사선생님의 말도 있었다. 아무튼 나는 유전적인 것으로 보고 내 대에 와서 좀 더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친가도 그렇고 내 친동생도 허리측만증이 있지만 나보다는 심하지 않다. 일찍 그리고 심하게 진행이 되어서 보조기도 하고 노력을 했지만 결국 성인에 와서도 심각해져서 수술을 강행한다.


허리수술은 9시간이 걸렸으며 허리수술로 유명한 병원에서 받았다. 70도에 육박하던 허리의 각도는 이제는 18도정도만 남아있다. 18도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처음으로 확인 된 내 허리의 각도와 일치한다. 처음의 척추로 돌아왔나보다.


허리수술 과정의 얘기로는 허리근육이 없어서 출혈이 많았다. 하지만 성공적이다.


깨고 나서는 중환자실이었고 매우 졸렸다. 그리고 천천히 내 통증을 가늠한다. 허리에 여러가지 갈래로 통증이 뻗어나간다. 이것만 내가 잘 파악하면 잘 다룰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꽤 난이도 있는 수술로 깨고나면 많이들 운다고하는데 통증때문에 운 적은 없다. 그때부터도 이성적인 T성향이 빛을 발하여 내 통증까지 이성적으로 감내한 것 같다. 그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다.


침대로 실려오면서 운동을 하면 빨리 회복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수술 당일날부터 침대 안에서 몸을 옆으로 굴리는 등 열심히 노력한다. 물론 허리가 뻐근하다거나 불편한 감각은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이 생에서 가장 참을 수 없이 아팠던 통증을 말하자면, 쌍커풀수술이 세상에서 제일 아팠다. 절개였고, 눈을 뜨거운 무언가로 지지는 느낌이 정말 고통스러웠다. 그 다음은 방광염.


아무튼 열심히 나름대로 회복을 위한 노력을 하고 3일만인가 드디어 누웠던 몸을 일으키는 날이 왔다. 허리의 안정감을 위해 보조기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잠시 침대를 일으켜 앉았는데 그때의 띵하면서도 급하게 토기가 올라오는 현기증이란... 하늘이 그야말로 노래지고 얼굴의 혈색이 싹 내려갔다. 온 몸이 한순간에 식은땀에 확 젖어버리고 난 얼른 다시 누워버렸다. 단 3일을 누워있었는데 이렇게 몸이 안 좋아지다니. 큰 수술이 맞긴 맞았나보다. 이후에도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또 제대로 서서 걷는 것만해도 일주일은 넘게 걸렸던 것 같다. 다시 걷는데 내 발이 내 발 같지 않고 둥둥 허공을 떠다니는 듯한 그 기분은 감각은 정말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 같다. 그리고 그렇게 걷다가 실컷 마신 오렌지쥬스를 분수처럼 뿜어버린 것도.


사실 허리수술은 수술 당시는 전혀 힘들지 않다. 하지만 그 이후가 정말 힘들다. 기력도 저하되고 현기증, 구역감, 어지러움 등이 자주 생기면서 몸이 잘 회복되지 못했다. 날 도와주시는 도우미아주머니는 잘 회복되야한다면서 재활치료 겸 병원의 1층 전체를 돌고 2층까지 아무튼 굉장히 긴 코스를 매번 돌게끔 동행했다. 결국 원래도 마른 편이어서 45키로그램정도 되었으려나, 그 상태에서 수술 그리고 너무 열심히 해버린 재활운동으로 인해서 나는 38키로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기운이 없고 몸이 말이 아니지...


퇴원하고나서는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정도로 꽤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기운이 정말 없었다. 뭔가를 먹고 소화를 시키는 게 불가할 정도여서 항상 체기가 생겼다. 그러면 난 또 답답하니까 바깥을 걷고 산책했고 그러니 살이 붙을 시간이 없지. 사람이 살을 빼는 것도 힘들다하지만, 의외로 살이 찌는 게 어렵다. 몸이좋지 않은 사람은 살을 찌우는 게 너무나도 어렵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살이 있어야 기력도 생기는데 몸이 체중이 미달이 되니 뭔가를 먹더라도 항상 기력이 미달됐다. 뭔가 이때부터 내 인생의 하향곡선이 그려지기 시작하면서 몸이 너무 안 좋고 자주 활동이 멎었다. 대학생때였는데 방학동안 받은 수술이기 때문에 한달정도 요양하다가 학교를 다녀야하는데 수시로 몸이 쳐지고 활동이 안 됐다. 그러나 그걸 다른 학우나 친구들이 이해를 하겠냐고.


다들 엄살로 보고 아침마다 기운이 없어 일어나지 못하거나 엄청난 두통에 의해 구토감이 생겨 일어날 수 없는 날이 많아지면서 나는 자연히 학교 수업에 책임감이 없는 사람, 발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 뭐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걸 또 어떻게 일일히 다 설명해. 모르면 그런 사람인가보다하고 넘어가.


아파서 약속을 깨면 그리고 심지어 아파서 응급실과 입원을 하게 된 상태에서도 난 내 상황을 설명해야했고 내 아픔보다 자신의 약속이 깨어져 짜증이 난 상대를 이해해야 했다. 그때 많이 생각했다. 아픔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되자고. 아프면 사람이 자신의 일을 할 수도, 지킬수도, 활동이나 소통도 결국에는 힘들고 소홀해지는 듯이 보여진다는 것을 알았다. 본의 아니게 아픈 건 사람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이게 어디가 확 아프거나 질병이면 이해를 하겠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단순 수술후유증 게다가 갑상선도 오고 몸이 말이 아닌데 어디 다친 건 아니고 병도 모르겠어. 기운이 없고 손이 떨리고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부서질듯이 아프면서 아무것도 못 먹을 정도로 하루종일 토기가 올라와. 먹지 못해 몸이 또 아프고, 몸이 아프니 뭔가를 먹을 의욕도 또 소화를 시킬 힘도 없어. 체중은 계속 내려가지, 몸은 제 구실을 못 해. 이게 악순환이다. 억지로 먹는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몸이 따라줘야 먹지.


보약이나 지어먹을걸.


수술후유증은 그렇게 몇년을 갔던 것 같다. 그야말로 내 대학교 생활 후반부는 그리 좋지 못했다. 의욕도 많이 사라져서 결국 전공보다는 인생의 회한이 느껴져서 철학수업만 주구장창 들었다. 내 학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철학수업만. 마치 복수전공하는 학생인 줄 알았겠지만, 난 그냥 살고 싶어서 들었어요. 아무도 내 입장을, 이해해주지 못하니까. 인생을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보면서 나처럼 여러 고민을 한 철학자들의 생각은 나를 안심시켜주었고 흥미로웠다.


당연히 학점은 필요없는 교양수업만 들어 치우치게 되었고, 전공학점이 잘 채워지지 않아 결국 F이런 성적미달로 인한 빵꾸가 아니라 진짜 학점계산을 안하고 들어버려서 빵꾸가 났다. 그것도 애매하게 2, 3점 정도. 그래서 5학년 반학기를 다녔다는 근사한 이야기로 내 대학교 생활은 마무리가 되었다.


수술후유증으로 대학생활이 성실하지 못했다고만 보는 건 아니지만, 영향이 있었다. 차라리 그런데 그게 낫다. 사회생활하면서 그렇게 아프다면 얼마나 비참한가. 다행스럽게도 갑상선도 심했던 나였는데, 오히려 자율적인 대학생생활이 내게 맞지 않았는지 졸업하고 얼른 취업하고나서 규칙적으로 출근 후 일하고 밥먹고 퇴근하고 적당히 걷고 이런 루틴을 지키다보니 몸이 아프지 않게 되었다. 그 지긋지긋하던 두통도, 갑상선 수치도 많이 정상화되어서 정말로 편안하게 출퇴근하며 졸업후의 내 생활의 새로운 경종을 울렸다.


나는 학생보다는 이런 루틴에 사로잡힌 직장인이 체질이었던 모양이다. 책임감이 나를 살린 건가. 아무튼 허리수술로 인해 여러가지를 경험했다. 수술 직전에는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다가 옆침대의 아주머니를 위해 그 아주머니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를 해주는데 그게 너무 부러워서 울었고, 내 낌새가 이상해서 집에 가려다가 다시 돌아온 엄마가 우는 나를 발견하고 당장 우리가 다니던 교회의 담당 목사님에게 연락해서 오시게 했지. 사람은 단순해서 목숨이 걸린 상황에 오게되면 자연히 신을 찾는다. 나는 쌍커풀 수술을 할 때에도 손을 떨며 주님을 찾았다. (부분마취여서 더 무서웠다.)


아무튼 어릴 때 된통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그게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도움은 되는 것 같다. 지금은 건강하고 기운이 있고 몸무게도 50을 찍는다. 여전히 등에는 수술자국이 크게 나있다. 길죽하게 허리선으로. 그러나 나는 이걸 감추지 않는다. 감추지 않는다기보다도 잊는다. 그래서 지난번 다녀온 베트남에서 마사지를 받는데 마사지사가 내 등을 보고 손을 떨며 괜찮냐며 물었던 게 웃겼다. 미안해요, 놀랐죠.


나도 모르고 누군가에게 내 등여드름을 보여준다거나 등이 깊게 파인 옷을 입는다거나 그러면서 머리를 짧게 하거나 묶었을 때 나는 정말 잊는다. 내 등의 상처를. 그러나 뒤에 사람들은 보겠지. 한때는 허리는 내 스트레스여서 고등학교때부터도 휜 허리로 인해 등의 비대칭함이 싫었다. 내 뒤의 사람이 내 등을 보는 게 싫었다. 그래서 머리를 기를 수 있었던 고등학교대부터 쭉 꽤 오랜기간동안 나는 긴머리만 고수하면서 허리를 감췄다. 허리를 감추는 용도의 긴머리였다.


그건 꽤 오래 유지가 되어서 20대 중반까지 그렇게 긴머리로 지냈다. 그러다가 점점 내가 허리의 상처를 잊고 나도 하고싶던 머리가 생겨서 머리를 잘라도 보고, 등이 파인 옷도 입는다. 뒤에 누가 있든, 누가 내 등의 상처를 눈치채든 상관없어졌다.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그냥 최근에는 나는 신경쓰지 않아서 등이 파이거나 머리를 묶어 어깨밑부터 배쪽까지 내려온 허리선으로 이어진 수술자국이 보일만한 옷, 혹은 사우나를 가더라도 잘 인지를 못한다. 대신에 언뜻 사람들이 조금 흘긋하면서 허리를 본다 싶으면 그냥 속으로 머쓱하며 중얼거린다. 미안해요, 상처가 좀 무섭겠지만, 아파보이겠지만 이해해주세요.^^ 이제 전 아프지도 않고 괜찮아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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