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추측만증
익히 적은 바 있지만, 아직 할얘기가 많이 남았는지 여전히 척추측만증에 대한 이야기다.
이전에 수술이야기를 적었다면, 오늘 하고자하는 나의 기억이야기는 보조기. 수술 전 그리고 발병후의 과정이다.
성장기에 허리가 휘기 시작하면 성장과정때문에 더 심하게 휘어버리는 경향을 보인다. 나의 경우, 성장에 필요한 모든 성분들이 다 허리를 무너뜨리고 휘어지게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엿는지 키는 별로 크지 못했고 허리만 더 심하게 휘어갔다. 이미 교정치료같은 걸로는 치료가 불가한 정도였고 중학생때 30도 정도, 윗척추와 아랫척추 두 부분이 다른 방향을 향해 휘어버린 S자 형태의 척추상태였다. 겉으로 티는 안 나지만 상당히 무섭지 않은가. 몸을 지탱하는 척추뼈가 양쪽으로 휘어져있다는 게.
통증같은 건 별로 없었고 생명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점점 진행이 된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 만큼이나 시한부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그것은 삶에 경험치가 없는 중학생에겐 상당히 빡센 상황이었다. 내가 어떻게 겉잡을 수도 없고, 공부처럼 노력을 해서 점수를 따낸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허리를 어떻게 멈추게 하는지 그 방법을 몰랐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보조기를 권했다. 보조기란, 허리의 변형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허리를 고정하는 방법의 착용하는 보호대다. 지금은 석고로 나오는 것 같은데 그 당시는 플라스틱, 요즘도 교통사고로 갈비나 허리 다친 사람들이 주로 환자복 위에 착용하고 다니는 그런 플라스틱 보조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그게 척추측만증의 전용 보호대라고 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조금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허리를 보호하는 정도의 사고후유증을 위한 보호대가 아니라, 이건 허리의 변형을 막아야하는 목적이기때문에 조금은 필사적이다. 딱딱한 내 몸에 맞춘 그 보조기를 허리에 착용하는데, 그 당시 여름이었고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교복 하복을 입었다. 다행히 교복을 줄이지 않는 착한 학생이어서 교복 품이 넉넉했다. 보조기는 적어도 3센치정도는 두께가 있었다. 딱딱한 보조기를 흰 나시위에 걸쳐 착용한다. 자리가 없어서 브레이지어는 착용하지 않았던 것 같다. 틈이 없다. 나시 위에 바로 보조기 그리고 그 위에 하복 흰색 교복셔츠를 입는다. 나 말고 다른 척추측만증 친구들은 수술 전 이 보조기를 학교에서 어떻게 착용하고 다녔을지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나만 이렇게 고생을 한 건지, 아니면 누군가도 나처럼 더운날에 교복 안에 두껍고 딱딱한 보조기를 입었었는지. 적어도 내 주변에는 나 뿐이었다. 그러니 세상에 나 혼자 이러고 지내는 것 같았다.
남들 예쁘게 보이려고 치장할때 나는 이미 '장애'와 '비장애'속에서 헤엄치는 중이었다. 누가 봐도 보조기를 한다는 건 '장애'였으니까. 이상했으니까. 숨길래야 숨길 수 없고 어깨가 왜소한 나는 등부분이 마치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벌어졌다. 옷을 입으면 등이 안에 책가방을 맨 아이처럼 두툼하게 뭐가 올라와있었다. 말랐기때문에 체구에 비해 상체가 커보이는 것도 보조기때문. 아마 다들 알지 않았나 싶다. 책가방도 매고 보조기도 하고. 그게 내 중학교때의 기억이다.
보조기는 그냥 착용하는 게 아니라 휘지 않기 위해 엄마가 꽉 아주 꽉 매어주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코르셋이라고하면 될까. 근데 그건 가슴까지는 안 막잖아.
숨을 짧게 들이쉬고 내쉰다. 밥도 많이 못 먹는다. 뭔가를 생각하거나 하기가 벅차다. 하루종일 몸이 매여있다. 그런데 내 가슴, 배, 골반을 걸친 보조기의 찍찍이를 쫙 땡겨서 붙이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지금은 좀 궁금하다. 엄마 살기도 바빠서 날 위해 흘릴 눈물도 한숨도 없었을까. 숨어서 울었을까. 모르겠는데 당시에는 그냥 꽉 조이던 엄맘의 손만 기억이 남는다.
보조기를 꽉 조이면 숨을 잘 쉬지 못하는 것도 그렇지만, 한창 성장기인데 조이다보니 가슴이 많이 압박이 된다. 가슴이 많이 아프고 이제 막 멍울이 지고 자라기 시작하는 가슴도 어김없이 보조기로 꽉 죈다. 뭉개지고 수그러드는 내 안타까운 어린 가슴. 내 가슴의 성장을 저해한 요인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또 내 동생을 보면 (동생 미안) 그다지 대단히 자라날 유전적인 가슴은 아니었음에 조금 위안을 삼는다.
그래도 어느 정도 요인이 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혹은 같이 샤워하거나 사우나에 있는 사람들에게 혹은 밤을 맞이하는 남자친구들에게 매번 '내 가슴의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서럽지만 보조기가 아니었어도 이 사이즈였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조금 서럽다. 보조기는 내게 꽤 많은 것들을 옭아매었다.
그래도 상체에 비해 하체는 열심히 발달해주었는데, 골반이 커지면서 보조기의 끝자락에 자꾸 부딪히는 일이 많아져서 골반은 항상 멍자국이었다. 저릿하기도하고 꽤 아팠던 기억이 있다. 여러모로 불편하면서 고통스러운 보조기였다.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된 시기이다보니 좋은 퀄리티의 보조기가 있을리 없겠지. 지금은 어떠려나? 모르겠다.
보조기를 해서 좋은 점? 아직까지 허리를 잘 굽히지 못한다. 허리를 꼿꼿이 들고있는 그게 허리에 각인이 되었는지 허리를 굽히지 못한다. 요가같은 것도 잘 못하고 윗몸일으키기도 못한다. 그런데 이걸 매번 요가선생님에게 설명할 수 없다. 그냥 못한다고 할 뿐이다. 원래도 유연성은 별로였으니 할 말은 없지만. 헬스 피티선생님에게 복근운동할때 올라오지못하는 내 상체를 비웃어도, 뭐라해도 반박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을테니까.
아무튼 지금까지도 나는 허리하나는 꼿꼿하다. 보조기덕분에 얻은 건 꼿꼿함.
어린 시절이다보니 간혹 책상에 내 뒷모습의 보조기 모양을 화이트(글자를 수정하는 도구)로 그린 아이도 있었고, 나는 그게 아이스크림인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내 뒷모습이었다. 그래도 꾸준히 친구들은 있었다. 날 괴롭힌 아이들도 없었고 신기하게 생각하는 건 있었겠지만 꽤 괜찮게 지냈었다.
다만 실질적인 내 생활에 지장이 생기는 게 많았는데, 통증도 그렇지만, 더운 여름에 보조기 안에 나시 하나만 입더라도 일단 보조기 자체가 통풍이 안 되는 3센치 두께의 플라스틱이다보니 더웠다. 땀도 그대로 보조기에 스며들면서 알게모르게 체취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거리두지 않고 나와 함께해준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항상 귀가하고 집에 와서 씻을때 정도 보조기를 뺀다. 잘때도 착용했으니까 거의 23시간 동안은 착용을 했던 것 같다. 보조기를 벗으면 익숙한 걸레를 삶은 듯한 후끈하면서도 내 땀의 체취가 훅 풍긴다. 쭈글쭈글해진 나시. 잔뜩 젖어버린 내 상체. 언제는 내 그런 모습을 보더니 동생이 인상을 쓰며 '윽, 냄새'라고 했는데 그 기억이 아직 나는 걸 보면 나는 그 당시 꽤 슬펐을지도 모르겠다.
어느날은 보조기 안의 나시를 제대로 펴지 않고 입었는지 왼쪽 가슴 옆 그리고 겨드랑이 아랫부근에 나시가 많이 뭉쳐있었다. 그런 채로 보조기를 꽉 조여서 하루종일 덥게 다니다가 푸르고나니 여기저기 쓸렸는지 그 부분의 살이 심하게 패여서 피가 나 있었다. 커다란 반창고를 붙여도, 상처는 생각보다 낫지 않았고 간신히 나았다하더라도 20년이 지난 지금도 옆구리 위에는 여전히 푹 패인 손으로 감각이 만져지는 흉터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 만져보면 굉장히 생소하지만, 그때 내 마음, 몸상태는 아마 이 상처처럼 하루하루 너덜너덜해져있었던 것 같다. 꽤 감당하기 힘들었을텐데. 시선도, 나 자체도. 근데도 그냥 견뎠다. 꽤 우울했던 것 같다. 근데 그래도 친구들이랑 재밌었고 과외도 다니면서 과외친구들이랑도 재밌었다.
다 나쁜 날들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보조기는 나중에 중학생이 지나고나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어서 자가적으로 벗어버렸다. 분명 보조기를 꽉 조여서 착용하면 다음 검사때 1, 2도밖에 휘지 않았지만 나중에 아예 풀고 나서는 쉽게 10도 이상 더 많이 휘어져버렸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20세 이후에는 위 아래 척추 두개 모두 60도를 육박했고, 이대로면 골다공증이나 허리의 문제로 이어진다고해서 결국 수술을 받은 것이다.
고생은 고생대로 다 하고 결국 수술을 했다, 이건 자연분만을 하려고 온갖 고통을 며칠동안 견디다가 아이가 고개를 들어버려 수술을 하고만 여느 산모와 같은 상황인 것이지.
보조기, 살면서 많이 잊고 있는 부분이다. 다시 글을 쓰려 생각해내보니 여러 기억이 나서 신기하다. 아마 사주가 맞다면 그 시기 나는 대체 무슨 안 좋은 시기였길래 그렇게까지 몸이 불편하게 지냈던 걸까 싶기도 하다. 초년운이 좋지 않은 것도 다 연관이 있나?
아무튼 보조기는 굉장히 불편한 기억, 괴로운 고통이었다. 다만 그런 고통스러운 나인데도 즐거운 기억이 많은 건 그 때가 그리운 건 친구들과의 시간 때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