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년연애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별한 상태.
사귈때는 몰랐는데 헤어지고나니 단 100일, 50일도 기나긴 사람의 인연이라는 기분이 든다. 어떻게 그렇게 사귀었을까. 아마 처음부터 하늘에서 '너희는 10년을 사귀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분명 오래가지 않았을 것 같다. 모르니까 사귄거고, 모르니까 좋아한 거지.
장기연애와 오래산 부부는 사뭇 다르다. 그걸 같이 생각할 순 없다. 부부는 그 안에 책임감, 어쨌든 맺어진 사이라는 게 작용이 되어서 좀 더 끈끈하거나 이어갈 명분이 있다. 하지만 장기연애는 오로지 타이밍과 내 의지 그리고 상대의 의지 등등 조금은 얄팍하다. 언제든 끝나도 되는 사이,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사이 안에서 그런 울타리 안에서 오래 이어진 건 오히려 그런 얄팍함을 잘 알기 때문에 헤어짐을 함부로 하지 않은 마음이 크다.
10년을 통틀어서 보자면 '잘 만났다'이다. 후회없이 아낌없이 즐겁고 순간순간 함께여서 즐거웠다.
오히려 어정쩡하게 짧게 만난 사이일수록 원통하고 억울하고 미련이 남고 아쉽다. 왜냐면 아직 서로를 잘 모를때 헤어진거니까. 그러나 장기연애는 서로를 이미 몇 번이나 반복했고 여러모습을 봐왔고 눈에 많이 익었다. 더 읽을 게 없이 10번이상 읽어버린 책같다. 편하고 좋고 내용도 다 예상이 되는 책. 이미 대사조차 다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책. 그래. 책으로 표현을 하자면, 완벽히 내 맘에 드는 감동적이던 책이었는데, 그 책은 딱히 변하지 않아. 조금 책냄새가 나고 귀퉁이가 노랗게 변색이 되더라도 조금 낡아지더라도 그 책은 어디가지 않아. 근데 중요한 건 책을 넣는 가방이야. 책이 넉넉하게 들어가던 가방을 맨 상태에서는 그 책은 부담이 되지 않아.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고 상황이 바뀌고 그런 것들을 가방이 바뀐다고 표현해보자. 그러면 책의 크기가 조금 신경이 쓰여. 가방에 잘 들어가지 않아. 혹은 책으로 인해서 가방에 뭔가를 더 넣을 수 없어. 책이 슬슬 신경이 쓰이기 시작해. 거슬리고, 방해가 돼. 무겁기도 해.
연애 자체가 변하기 보다도 내가 느끼는 건, 상황 그리고 내가 변한다. 너와 내가 변한다. 그게 장기연애다. 너와 내가 변해가는 걸 느끼면서 우리 연애를 멍하니 바라보는 행위가 바로 장기연애다. 연애가 길어질수록 이 연애를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지 잘 얘기를 나눈다면 건강한 연애야. 하지만 서로 서서히 연애에 손을 떼고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그 연애를 바라본다. 이 연애를 어떻게 앞으로 다루어야할지 모르겠어. 자신도 없고 방법도 몰라. 그리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거야.
서로의 마음을 생각보다 모른다. 다 알 것 같던 내 손에 쥐고 있다 느끼던 너의 마음의 온도는 나도 모르는 사이 너가 꾸며대는 착한 거짓말로 헷갈리기 시작해. 정말 괜찮은 게 맞는지, 지금 즐거운 게 맞는지. 그리고 근본적인 질문, 날 아직 좋아하는 게 맞는지.
그리고 내가 널 아직 좋아하는 게 맞는지.
장기연애라는 거짓말로 너와 내 마음을 가리고 보여도 보지 않는 척 해.
아직 누구도 헤어지잔 말은 안했으니까. 이건 이어가도 되는 사이겠지. 서로에게 좋아하는 티를 내고 대충 사람좋은 연기를 해. 구태여 나쁜놈, 나쁜년되긴 싫잖아. 남들은 말하지, 와 그렇게 사귀다니 대단해. 근데 우리는 알아. 우리가 매우 낡아가고 있다는 걸.
마치 어정쩡하게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그 나라 사람을 만나서 막 쏼라쏼라해. 남들이 보면 멋지게 대응하는 건데, 정작 외국인과 나만은 알아. '엉망'인 대화였다는 걸.
남들이 보면 멋진 장기연애, 우리는 엉망인 장기연애.
이미 몇 번의 불만을 토로했고, 그건 나아지지 않았어. 근데 헤어질 이유가 딱히 없기도하고 헤어질만한 이유는 아닌 것 같아. 그러면 내 속상함, 원함을 포기해. 그러면 연애가 유지가 되니까. 아직 놓을 수 없는 너의 손을 잡는 대신 나는 현실적인 모든 걸 포기해. 그러면 너랑 연애는 가능하니까. 결혼? 남들은 속편하게 그 정도 사겼으면 결혼을 생각하는 게 아니냐고 물어. 근데 우리는 결혼에서 아주 많이 떠나온 사람들이야. 결혼이 없어야 우리 연애가 가능해. 그런 느낌, 아는 사람은 절절히 공감할거야.
너를 만나기 위해 결혼도 포기하고 현실적인 것들 그리고 내 모든 희망을 포기해. 그게 나의 장기연애였어.
그냥 너랑 좀 더 손을 잡고 세상을 걷고 구경하고 싶었어. 그래서 후회는 없어. 잠깐 생각해보는 결혼에서는 확실히 내가 너무 슬플 일이 많을 걸 예감해. 나는 세상을 살면서 굳이 후회할만한 선택은 안 하거나 보류하는 성격이야. 난 확고하게 내 미래를 알 수 있었고, 너와의 결혼은 너무 힘들 것 같은 예감이어서 나는 연애로 너를 택했어.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단지 너를 보고 연애를 한거야. 나를 좋아하는 너를 보고 너를 좋아하는 나를 보고.
그런데 사람은 상황에 따라 바뀌는 아주 약한 존재야. 나도 변했고 너도 변했고. 사랑? 그게 다 뭐야.
나는 아마 너를 내 색안경으로 치장해서 보고 있었던 것 같아. 너는 항상 회사에서 회식이면 싸우기도하고 뭔가 트러블이 많았는데, 그게 직장동료의 문제, 사수의 문제라고 생각했어. 고된 회사에 들어갔구나 했어. 나는 술을 안 먹잖아. 그러니 너가 취한 모습을 몰라. 근데 최근에 지인과 가진 술자리에서 '아, 그럴만하겠다'라는 것도 본 거야. 왜 이직을 하고나서도 너는 회사사람들이랑 트러블이 많은지. 술자리에서 취한 너가 나를 공격하듯이 말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꽤 머리가 아득해졌었어. 하나하나 꼬치꼬치 너의 식으로 편협하게 해석하고 나를 질책하는 말들에 손발이 떨리던데.
결정적인 건 애정의 문제보다도 우리는 좋을 때는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하는데, 싸울 떄 우리는 대화가 통하지 않아. 그리고 생각보다 너가 내 말의 의미를 내 본의 아니게 많이 오해하고 다른 시점으로 나쁘게 받아들인다는 걸 알았을때 더이상의 대화가 무슨 소용일까. 여태까지의 대화는 결국 어긋나있었구나 하는 게 느껴졌어. 그리고 내가 하는 말은 너의 귀에 꽂히지 않아. 제 3자가 내 입장에서 하소연해주니 그제서야 그건 듣더라. 그래서 나는 내가 널 서운하게 했다는 그 몇가지에 꽂힌 너가 매번 윽박지르며 내지르는 그 내용들에 숨이 막혀 결국 헤어지자 한 거야.
그냥 우리는 조금 뭐랄까.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데. 좋은 시절을 보냈어. 그런데 막상 즐거웠는데 나중에 보니 서로 다른 '종'이었어. 너무 즐거웠는데 지구인과 외계인처럼 아예 다른 종이었어. 그걸 이번에 알았어. 나는 내가 '아'라고하면 '아'라고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게 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10년간 꾸준히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래왔는데 참 신기하지.
장기연애는 '와 저사람들은 서로밖에 없나보다, 정말 끈끈한가보다'라고 보여지는데, 장기연애만큼 이별직전인 사이도 없어. 다들 계기만 찾고 있는 건지도 몰라. 헤어지게 될 계기. 서로 너무 안일한거야. 그리고 나쁜놈되기도 싫은거고, 용기도 없는 거야. 그냥 현상유지, 달리 뭘 하고싶은 것도 아니고 변화를 줄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연애가 이어지는 건데, 결국에 그 시절동안 '우리가 만나야할 이유'보다 '헤어져야할 이유'가 많아지면 가득 차오르면 헤어지게 되는 것 같아.
사랑은 타이밍보다도 '결혼이 타이밍'이라는 말이 맞고, 만남도 헤어짐도 다 타이밍이야. 그리고 자꾸 어긋나는 타이밍에 지치면 그냥 무조건 헤어지는 게 답이야. 그건 그냥 인연이 아닌가보다 해야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가 생긴 것도 아니고 그냥 이제 더 구질구질 이 책이 찢어지고 곰팡내가 나서 더는 읽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끝내는 게 건강하겠구나, 그런 순수한 마음이 들었어. 좋을 때 끝내고 싶었고 그래야 우리 추억이 기분 좋게 남으니까. 나는 아직 추억이 즐거워. 어릴 적 엉엉 울던 그런 헤어짐이 아냐. 그냥 연애로 즐겁기도 했지만 번번히 좌절하고 울고 힘들었던 나에게 주는 자유가 이별인 거야. 그래서 지금은 이 씁쓸함도 꽤 즐거워.
즐겁게 읽히던 우리의 연애였는데. 그게 짐이 되고 가방에 담기 싫은 펄펄 먼지나는 낡은 책이 되어버렸네. 이제 고이 내 책꽂이에 두고 종종 생각이 나면 먼지 툭툭 털고 읽어볼거야. 너가 가도 추억이 남으니까 그건 온전히 내 것이지. 잘 사귀었다. 너도 나도 좋은 사람이었고 좋은 인연이었어. 단지 인연이 끝났을 뿐. 그래서 서로가 곁에 있어도 서로를 못 보게 된 것 뿐이야. 너와 내가 끝까지 함께할 수 없는 걸 알았는지, 우린 참 오래도록 손을 잡고 매일 매일 잘 걸어다녔어. 좋은 것만 기억하고 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