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이 뒤에 그림자 같던 버스 안 풍경

누군가의 조연이던 20대

by 김지은

내가 주체적으로 내 삶을 살게 된 건 20대중반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다. 항상 누군가에게 묻어가거나 누군가가 이끌어줘야 움직이는 수동적이고 내 삶에 대해 직시하지 않는 그런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내게는 나를 도와주는 이보다도 나로 인해 조금 편안해지는 이들이 자주 모였다. 즉 내가 조연으로 자리하여 주연으로 활동하기 좋게끔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 좀 형식적으로 설명하다보니 인간미가 없어 보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우정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겠는가. 결국에는.


학창시절에도 쭉 그렇게 지내오고, 내가 주연이 되고자하는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청춘드라마의 그런거? 나와는 다른 별개의 이야기라 생각하고 난 항상 튀지 않는 아이로 존재로 지내고자했다. 딱히 튈만한 무언가도 없었고 있다하더라도 숨겼으니까. 나는 꽤 엉뚱하고 드립을 잘 치고 사차원이었는데 그것도 꽤 숨겼어서 날 모르는 아이들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나랑 친한 아이들만 알고 있는 부분.


학창시절에는 그런 나를 순수하게 마음으로 좋아해주고 같이 해준 친구들이 많았다. 적어도 내가 작아지는 친구들은 없었다. 즐겁게 기억이 된다. 하지만 대학생때부터는 친구관계도 사뭇 다르지. 아마 대학생때 사귄 친구가 30대이후까지 쭉 이어지는 케이스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이어진다 해도 형식적이고 굳이 추억할만한 게 있을까 싶은데, 초중고랑 다르게 대학교는 여러 각지에서 모이는 친구들이기도하고 각자의 상황, 레벨을 교묘히 계산한다. 나는 그런 거 계산 없이 룰루랄라 여전히 머리 꽃밭이었지만, 지금 다른 애들을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학교떄 이런저런 차별, 자괴감, 자격지심이 많았던 고민을 하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만 나는 경제적이든 뭐든 학점이든 그런 거에 레벨을 두지는 않았는데, 하나 부럽다, 라고 느껴버리는 것은 '활동성'이었다. 이는 몸의 활동이 아니라 '인간관계 속의 활동성'을 말하는데, 나는 지극히 개인주의인 사람인데 그 활동성을 이해하거나 내가 본능적으로 적절히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그때당시는 엠비티아이 이런 것도 없어서 그냥 내성적이거나 개인주의인 사람은 '어딘가 조화롭지 못한 사람'으로 인지기 되고 스스로도 그런 내게 갇혀버렸다.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뭘 해야 활동적으로 다들 친근하게 지내는지를 모르겠는데, 대학교생활은 꽤 그런 활동성을 강요하기도하고 그래야 정상적으로 보여지기도 했다. 물론 친구들은 있었는데, 나를 좋아해서 함께하는 친구라기보다도 '편하니까'라는 느낌이었어서 간혹 배려없는 어떠한 부분 혹은 나를 대충대하는 부분들도 눈치가 둔한 그 당시의 나에게도 느껴질 정도로 이전의 친구들과의 우정이랑은 사뭇 달랐던 것 같다.


개인적인 성향의 아이는 주로 활동적인 아이들의 편한 존재가 된다. 즉 다루기가 쉬운 모양이다. 대학교때에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아이 이름을 조금 부르게 편하게 류정이라고 불렀었다. 그 아이는 굉장히 활동적이고 활발한 친구였고, 나랑은 1에서부터 10까지 같은 게 없는 아이였다. 매력적이고 활동적이고 알바면 알바, 동아리면 동아리 뭔가 굉장히 활기찬 대학교생활을 보내는 아이였다. 연애도 하고 있었고 심지어 여러 사람과의 썸도 있었고 정말로 청춘을 즐기는구나! 라는 느낌의 타입이었는데, 나는 그에 정 반대였다. 그 아이가 태양이라하면 나는 정반대에 위치한 달같은 느낌. 나는 그 당시 연애도 오래 하지 못했고, 썸도 그다지 없었고 인기도 없었고 잔잔바리하게 알바도 많이 하지 않았고, 책을 좋아하고 집순이이기도 했다.


왜 그리 이질적인 타입이랑 친구가 되었냐하면, 이전에 친하게 지내던 다른 친구가 있었는데(그 친구는 나랑 비슷한 내향형이라 꽤 잘 맞았다) 그 친구가 사귀어온 친구라 셋이서 자주 만나고 놀게 되었는데, 원래 친구가 다른 학교로 편입을 위해 휴학을 하게 되면서 남은 게 우리 둘이었다. 그래도 나에게 못되게 군 게 아니고 성격이 다른 부분이 있었기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즐거운 추억도 많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편할대로 나를 데리고 다닌 것도 맞다. 태양이 혼자 떠있으면 따분하지만 달이랑 같이 있으면 좀 더 빛을 발한다. 나는 그 아이의 좋은 비교대상이 되어서 꽤 편하게 같이 있었을거라 본다. 내적으로 아주 친해진 것도 아니고 겉으로 편하게 친구가 된 사이, 그리고 항상 그 친구는 어딜가나 주목을 받고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다양한 표정, 동작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별로 그런 성격도 아니었고, 어릴적부터 애늙은이 같은 침착한 성격이었어서 (친한 상대에게만 좀 더 나타나는 성격) 학교에서는 그 아이와 반대되게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게 지냈다. 그 아이 외에도 친구들은 있었지만 대학교 2, 3학년까지는 주로 그 친구랑 지냈던 것 같다.


활발한 친구덕에 여기저기 놀러도 가고 즐거웠다.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단지 그 친구의 옆자리를 채운다라는 느낌은 그래도 있었던 것 같다. 진짜 친구가 아니니까. 라는 느낌.


나중에는 자연적으로 자기와 맞는 친구들 무리로 가게 되고, 나도 내가 혼자 생활을 하는 게 좀 더 맞고 편하다는 걸 점점 깨달으면서 그 친구랑은 점점 후에 멀어졌지만, 그렇게 지내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 날, 그 날은 학교 엠티가 있었던 날이고 나는 그 친구가 있었지만, 사실상 그 친구는 다른 여러 친구들이랑 지내느라고 나 혼자의 엠티같은 느낌이 큰 기억이다. 나 역시 다른 소소한 성격의 친구들이랑 모여서 엠티를 지내고 이후에 돌아오는 엠티 버스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그때 기억이 난다.


멍하니 앉아있는데, 버스의 앞자리였나보다. 그래서 큰 창가로 비추는 햇살이 버스안으로 창문의 모양을 하고서 바닥에 드리워져있는데, 내가 앉은 자리까지는 빛이 오지 못했다. 딱 내 그림자가 시작되는 지점의 전까지만, 빛이 드리워지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조금 멍해졌던 것 같다.


세상에 빛이 비추는 자리가 있어. 저 자리는 주인공자리. 그런데 나는 그 빛에 내 그림자조차 비추지 않는 그들 속에 있어. 마치 그늘 속에 잠겨있듯이 숨어있듯이 보이지 않는 그늘 속 내 발치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가벼운 낙담을 느낀 것 같다.


제대로 내 삶을 살지 못한다. 제대로 내가 활약하지 못하고 내 존재가 침몰해간다. 누군가는 빛속에서 살고 누군가는 그늘에서 산다. 나는 철저히 그 당시 그 친구의 그늘에서 지내는 느낌이었고, 그냥 내 삶의 그늘에서 움츠려 떠는 존재였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다.


'나도 저 빛으로 당당하게 나가고 싶어.'

'이 어두운 그늘에서 나가고 싶어.'

'나도 누군가가 봐주면 좋겠고, 나도 저렇게 크게 웃고 내 말을 하고 싶어'


단순히 친구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뭔가 내 스스로의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이렇게 숨어서 누군가의 뒤에서 지내는 게 아니라 혼자라하더라도 내 발걸음, 내 스스로의 모습으로 당당하고 싶었고, 당장에 타죽을지라도 저 빛나는 빛의 공간 속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친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되고 싶었다'.


나는 지금 무척 나를 잃고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살고 있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무척 아쉬워졌다. 나도 충분히 좋고 매력적인 사람이고 나의 장점도 있고 나도 나로 인해 웃는 친한 친구들도 있어. 이 그늘은 이제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당장에 나는 그늘안에 있지만, 언젠가 그 그늘을 나가서 햇빛속에 나아가길 바랐다. 그게 마음이 잔뜩 다짐으로 남아있었는지 점점 더 나는 힘을 얻고 노력을 하고 나를 믿어가며 20대 중반부터는 내 스스로의 힘을 키우면서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주연으로 살고 있다.


내가 원하던 대로 그늘이 아닌, 빛속으로 내 스스로의 거짓없는 꾸밈없는 나 자신으로 지내고 있다. 물론 날씨처럼 언제나 항상 빛만 있을 순 없지. 언제는 다시 먹구름이 오기도하고 그늘이 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대로 흙탕물도 밟고 어두움을 즐기고 그늘이 들어간 날은 그늘에 앉아 쉬기도하고 인생의 비도 맞아보고 폭설도 맞는다. 누군가의 곁에 있으면 그런 것들을 좀 피해갈까, 기대하지 않는다. 오로지 내 걸음으로 내가 온전히 그런 것들을 다 경험하고 직접 맞아보고 취해본다. 일부러 그늘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일부러 누군가의 곁에서 기대려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로써 살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 내가 걷고 싶은 곳에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으며 내 속도로 지낸다.


항상 햇빛이 아니어도 돼. 항상 활동적인 내가 아니어도 돼. 그저 나로지내면 그 모든 게 충족이 되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연기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나의 장점, 부족한 점, 단점 모두 인정하면서 지내는 것. 그러면 넘어지더라도 '아이, 내가 이게 부족했지, 알아, 괜찮아 저번에 넘어져봐서 어떻게 일어나는 지 잘 알아.'하면서 나를 다독이거나 위로할 수 있다. 나의 마음을 아는 건 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걸음을 축복하고 사랑하고 믿는다.


그때의 어두운 마음, 조연으로 지내던 시절이 있어서 지금 나의 마음, 다짐, 신뢰가 크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의 걸음에 발맞추는 게 아니라 나의 발소리에 집중하며 내가 걸을 수 있는 정도로 걷는다. 힘이들면 쉬거나 멈춰도 되고 또 달리고 싶으면 막 달려도 된다. 가장 밝고 즐거워야하는 어린시절, 젊은 때 오히려 어둡게 조연으로 지내다보니 20대 중반 이후에는 나로 지내는 이 시간들이 정말 소중하다. 내가 원하던 나로 지내는 게 정말 행복하다. 나를 구하는 건, 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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