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어릴적부터 고질병이 있었는데 그건 척추측만증
지금은 좀 순화해서 척추옆굽음증이라고 한다는데 나에겐 발음도 거친 측만증이 더 익숙하다.
어릴적부터 허리가 옆으로 휘었었나본데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프다거나 하는 게 아니기때문에 나도 잘 모르고 지내다가 초등학교 3학년때 실시한 검사에서 18도정도로 판명이 났다.
근데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생소하고 어떤 치료가 있는지도 잘 알려진 바가 없는 시대였다.
엄마에게 보여줘도 딱히 별 다른 대처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맞벌이였고, 여유가 없었다.
지금처럼 아이의 상태를 하나하나 검색해서 알아내는 세대도 아니었고 그런 것도 없었고.
그러다가 중학교때였나 다시 검사를 했는데 30도가 나왔고 전에는 한쪽만 휘었는데 이제는 윗쪽 척추와 아랫쪽 척추 구분이 되어 S자 형태로 허리가 휜 것을 알게 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진 것이다.
학교에서 나온 결과물에 대해 따로 병원을 찾으라는 통지가 있었는지 나는 엄마와 같이 근처의 정형외과를 찾았고 그 정형외과는 건물 전체가 정형외과였고 예쁜 연분홍색을 하고 있었다.
대체 허리가 휘면 뭐가 안 좋고 왜 이러는 거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 엄마는 멀뚱멀뚱 진료실에 앉아있었고 엑스레이를 보고 의사는 호통에 가깝게 화를 냈다.
'왜 이지경까지 놔뒀냐고.'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많이 혼났다. 먹고 살기도 바쁜 와중에 이런 상황이라면 엄마의 심경은 어땠을까.
속상했을까, 억울했을까,
하나 알겠는 건 많이 슬펐을 것 같다.
사랑을 표현하는 일이 적은 부모였고 엄마도 무뚝뚝할 정도로 성장기에는 어떠한 표현도 잘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당시 엄마의 마음이 많이 슬펐을거라고 생각한다. 부당하게 화를 내는 물론 나를 위해 화를 낸 거고, 이렇게 놔둔 보호자를 꾸짖는 건 정당할 수 있지만, 충분히 기분이 상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엄마는 묵묵히 듣고 고개를 숙였다.
분명 엄마는 많이 슬펐을 것 같다. 자신의 자식의 허리가 이렇게 많이 휘도록 몰랐을 자신이 창피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지 않았을까. 차라리 그걸 쓰게 말을 해준 의사가 고마웠을까.
누군가가 나를 위해 강하게 대처해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그 대처가 내 엄마를 향하는 건 너무 씁쓸한 기억이다.
그렇게 잔뜩 사태파악을 하고 난 모녀는 곧바로 의뢰서를 받아 큰 병원으로 향한다.
사실 너무 어릴적이라 순서는 생각이 안 나는데 아무튼 그랬던 것 같다.
역시나 그 병원에서도 아무래도 우리 지역에 이렇게 어린 아이가 허리가 이 정도로 휘어서 온 건 처음인 모양이라 다들 놀라는 기색이 있었다. 그게 나를 좀 더 겁을 먹게 했고 미래를 막막하게 느끼도록 했다.
큰 병원에서는 더 휘는 걸 막기 위해 보조기(지지대)를 제작해야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 당일에 보조기까지 본을 떴는지는 모르겠다. 어디까지가 첫진료였는지도 기억은 안 나는데 아무튼 절망적이었던 건 기억이 난다.
진료를 다 마치고 꽤 늦은 시간 엄마랑 같이 걸어서 집으로 향하는데 노을이 꽤 진하게 뒷통수로 비춰들어 사방이 붉었다. 엄마도 나도 발걸음에 힘이 없었다. 죽을 병은 아니지만 직감적으로 이게 끝도 없이 우리를 괴롭힐 거라는 게 느껴져서 였던 것 같다. 차라리 아는 병이면 좋겠는데 허리가 휘는 게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어디까지 휠 건지 성장기에는 더 많이 휜다는데 그럼 난 뭘해야하는지 가늠이 안 되었다.
어깨가 비대칭하게 약간 들리고 등표면이 양쪽이 다르게 올라가고 내려가고, 골반이 비대칭해지는 정도이지만 그때는 어릴때니까 이런 내 몸의 특이함에 대해 저울질할 뭔가의 예시도 없었다. 그냥 남들이랑 다른 '장애'의 느낌이 컸다. 뭐랄까 표현할 수 없는 이질적인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은 처음 느껴봤다.
엄마 역시 무척 무기력해졌을 것이고 지친 하루였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다독이는 말도, 괜찮냐는 말도, 어떠한 표현도 상의도 대화도 없이 우리는 걸었는데 꽤 좁은 인도길이었다. 그런데 바로 앞에 우리와 같은 또래의 모녀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녀는 매우 즐겁게 대화를 하고 있었고 걸음은 느긋했다.
충분히 지나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지나치지 못했다. 왜냐면 사람이 너무 힘들어지면 지쳐버리니까. 따라잡거나 느긋한 그 걸음너머로 지나쳐갈 힘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 뒤에서 무겁게 죽죽 늘어지는 듯한 노을을 온 몸으로 무겁게 몸으로 이고 걸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몇 십년이 지나더라도 난 그 길을 걷던 우리의 발걸음을 잊지 못한다. 그 날의 좌절을 잊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