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외가가 좀 많은데, 7남매로 이루어진 외삼촌과 이모들을 가지고 있다. 친가보다는 외가가 더 맘이 편하고 자주 보기도 했다. 7남매 중 우리 엄마는 장녀인 셋째. 그래서 호랑이띠이기도하고 뭔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하지만 푸근한 동네 아줌마의 느낌을 지닌다.
시골에서 자라난 7남매 중 큰 외삼촌은 그대로 시골에 정착하여 농부가 되셨고, 둘째 외삼촌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서 대기업에 취직 그리고 우리 엄마도 성인이 되어 서울로 취직을 했으며 자취를 하면서 아직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면서 돈도 관리해주면서 사회로 내보내주는 2차 엄마의 역할을 해냈다. 엄마의 손을 거쳐간 동생들로는 막내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인 여섯째 이모와 일곱째 외삼촌. 엄마가 베푼 게 있어서 그런지 외가 어른들은 언제나 나를 반겨주고 좋아해주고 다정하게 대해준다. 그냥 천성이 착한걸지도 모르지만.
특히 엄마에게 많이 도움을 받았던 막내외삼촌은 나중에 수시로 우리집에 컴퓨터를 준다거나 그런식으로 은혜를 갚았다. 그래서 나는 어릴때 꽤 일찍 컴퓨터를 갖게 되었는데 이후에도 내 돈으로 컴퓨터를 산 적은 없다.
엄마의 밑으로 넷째 이모는 어린 나이, 자신에게 반해서 따라다니던(?) 이모부와 급하게 결혼성사. 같은 마을의 옆 옆 집과 맺어졌다. 학생때는 운동신경이 좋아서 어떤 운동을 학교 대표로도 했다고 하는데, 숫기가 없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섯째 이모는 꽤 발랄하면서도 신여성이기도 하고 또 세련된 미모(미소년같은 느낌)여서 교회에서 따르는 남자가 많았고, 그 중에 좋은 집안으로 골라서 시집을 갔다. 이모부도 굉장히 슴슴하고 찬찬한 분이라 별 다른 문제 없이 여태까지 잘 지내고 계신다.
여섯째 이모가 우리 엄마가 업둥이처럼 봐주고 출가시킨 이모인데, 다섯째 이모 만큼이나 출중한 미모였다. 다만 다섯째이모는 발랄한 성격이었으나 여섯째 이모는 외모에 비해서 매우 소극적이어서 외모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직업도 전화연결해주는 그 당시의 직업을 하고 있었는데, 연결하던 중에 자주 연락이 닿던 외간 남자와 인연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예전에는 더 운명적이고 재밌는 만남이나 일화가 많았던 것 같다.
막내 외삼촌은 그야말로 집의 막둥이이자, 남아선호사상에서 가장 귀여움을 받는 위치였기에 부모님의 사랑은 물론이고 큰누나인 우리 엄마의 사랑도 독차지 했었다. 거의 우리 엄마가 먹여키우긴 했지만. 농부였던 외할아버지와 더불어서 외할머니도 바쁘게 농사일을 하시거나 하는 때면 엄마가 대부분 아이들을 돌본 모양이었다. 막내 외삼촌은 어린 내게도 친절히 대해주고 친구같은 그리고 편한 오빠같은 존재여서 지금도 친근감이 좀 더 크다. 내가 다섯살 이럴 때 막내 외삼촌이 군인이었으니까, 그래도 나이차이는 나는 편이다.
막내 외삼촌은 목사님을 꿈꾸며 신학대학에 들어갔다가 뭔가 안 맞았는지 혹은 어떤 부분에 상처를 받았는지 더 진행하지 않고 그 시기에 점차 발돋움하던 IT계열로 들어가 취직했다. 그리고 사장과 한바탕해버리더니 30대즈음에 회사를 과감히 그만두고 하던 일로 창업을 했다. 그리고 지금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삼촌이 사장이면 그 회사에 들어가면 되지 않느냐, 삼촌도 조카들이 자기 회사에서 편하게 일하는 걸 꿈꿨단다. 그래서 대학생때 삼촌이 종종 얘기를 했었는데, 나는 그 때에도 좀 철이 있었는지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이유는 적당한 선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내가 취직을 해버리면 이런 편하거나 안정적인 관계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여기저기 취직하며 내 터를 잡았다, 그건 지금 생각해도 잘 한 일인 것 같다.
이런 어마어마한 7남매 중에, 오늘 이야기하고자하는 분은 둘째 외삼촌. 7남매 중 가장 앨리트였다. 성공적으로 시골을 떠나 자수성가한 사람. 지금도 그때도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곳에 취직해서 꽤 높은 직급으로 계속 일 하셨다.
덕분에 둘째 외삼촌은 그 당시에 어린 내가 보기에도 정말 잘 사는 느낌이었다. 서울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시 수원에서 살았는데, 수원에서도 꽤 번화한 곳 그리고 새로 지어진 최신식 아파트였다. 나 역시 어릴때부터 분양당첨된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확연히 내가 사는 아파트랑 다른 아파트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10년 정도 간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사는 아파트보다 최신식 그리고 요즘 아파트들은 화장실이 이렇게 생겼고, 이런 인테리어구나, 구조도 우리집이랑 다르고 신기해! 라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평수도 달랐을 것이다.
넓고 쾌적한 둘째 외삼촌네 집은 주말마다 온 가족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따로 둘째 외삼촌이 일하는 서재 겸 컴퓨터가 있는 방도 따로 있었다. 우리는 그 방에 들어가서 당시 유행하던 플래시게임이나 플래시만화 영상같은 걸 보면서 꺄르르 거렸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자면, 시골에서 사시는 첫째 외삼촌은 4남매를 낳으셨고, 그 자녀들은 시골에 가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둘째 외삼촌네에 가는 날에는 볼 수 없었다. 둘째 외삼촌에게는 외동딸 하나가 있었고, 내 동생과 동갑이었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나랑 여동생, 둘을 낳았고, 밑에 이모도 딸 둘, 나이대가 비슷하고 바로 동네에 살아서 나와 사촌지간인 이모네 딸 둘은 셋이서 자주 노는 사이가 되었다. 역시 둘째 외삼촌네도 항상 함께 갔다.
다섯째 이모네에는 남매로 2명, 역시 여자애가 내 동생이랑 나이가 비슷해서 비슷한 나이대가 같이 놀았다. 그리고 여섯째 이모네도 남매로 2명, 하지만 꽤 나이차이가 나서 우리가 돌봐주는 정도로 까불까불 거리는 남자애와 조용한 여자애 이렇게 같이 오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에 막내 외삼촌은 아직 결혼 전. 그러나 예비외숙모 라고 불리던 결혼예정인 여자분이랑 같이 종종 놀러왔고, 예비외숙모랑 밤에 애들이 우르르 나가서 축구같은 거도 하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조카들만해도 7명에다가, 어른들만해도 10명 남짓. 총 17명 정도 되는 무리가 자주 방문하여서 시끌시끌 수다도 떨고 아이들은 무리지어서 여기도 갔다가 저기도 갔다가 화장실도 갔다가 난리를 치면서 놀았을테지.
그때 내게는 큰 집이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17명이 우르르 오기에는 너무 산만하고 어려웠을텐데, 흔쾌히 매번 방문을 허락하고 초청해주었다.
외동이면 자기 물건에 대해 예민해질법도 한데, 그 아이는 천성 유하고 순해서 자기 물건을 만지거나 인형을 만져도 기분나쁜 기색 없이 좋아했다. 집 주인인 둘째 외삼촌과 외숙모도 불편한 기색 없이 어린 나에게도 잘 대해주고 상냥했다.
아이들은 감이 좋아서 날 좋아하는 사람, 아닌 사람을 단번에 알아본다. 나는 단언하건데 외가에서는 모두들 날 좋아해주셨다. 그리고 조카들을 많이 예뻐해주셨다. 매번 용돈을 쥐어주는 건 아니더라도 물질적이 아니라 심적으로 매우 편안한 그런 분들이었다. 반대로 친가쪽은 매번 갈때마다 용돈을 쥐어주는데 맘이 편치 않은 곳이었다.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이지.
매년 어린마음에도 여름이 다가오면 티비속의 시원해보이는 풍경 그리고 푸릇한 풀잎의 선전을 보면서 곧 가게될 시골을 그렸다. 내 인생의 낙은 시골에서 외가 어른들이랑 친구같은 사촌들이랑 노는 거였다. 그게 정말 즐거웠고 지금도 여행지로 숲, 자연을 좋아하는 건 그리고 시골만 골라서 가게 되는 건 모두 무의식적으로 남은 시골에 대한 그리운 기분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시골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장소와 기억은 어김없이 둘째 외삼촌네다. 다들 모여서 놀던 곳, 넓고 깨끗하던 집. 와글와글.
지금 그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공간이었었다는 걸. 사랑받는 공간이었다는 걸. 지금도 우리의 온기가 집에 남아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