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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처럼 대화한다면.

<Conversations with Friends>을 집어든 이유


이 글의 내용은 샐리 루니의 <Conversations with Friends>와 크게 상관이 없다. <Normal People> 이후 믿고 읽는 샐리 루니의 책, 눈에 띄자마자 마음에 쿵 착지한 제목, 취향 저격 표지 그림까지 - 수초 만에 구매 욕구를 자극하여 읽어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사버렸다. 이제야 이 책을 읽기 시작했으니 내용은 잘 모르고, 제목만 소환해왔다.


'친구와의 대화'


코로나 시대, 곧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글에 '코로나'라는 단어를 넣기도 싫고 떠올리기도 싫다. 'Keep the distance! Bitte Abstand halten!'를 외치면서도 친구들과의 끝없고 강렬한 수다 시간이 그립다.  


예전에 근무하던 병원에서 일할 때 여고생처럼 점심시간을 기다렸다. 점심밥을 쏜살같이 쑤셔 넣고 근처 카페에 모여 앉은 동료 의사들, 남아있는 점심시간 35분을 깨알같이 쪼개며 대화에 매진했다. 우리의 대화는 정말 진지했다. 환자들을 진료하다 생긴 고민, 바람직한 발달 방향에서 어긋날 것만 같은 아이에 대한 육아 상담, 남편 자랑 혹은 남편 욕, 어제 본 드라마 얘기, 상사 욕, 이것 저것 검색하다가 발견한 예쁘고 핫한 아이템, 돈 고민, 아파트 고민, 인생 고민 등 우리의 대화 소재는 정말 무궁무진했다. 그 시절이 지금도 그리운 까닭은, 작은 카페에 모여 앉아 다 같이 좋아하는 커피를 앞에 두고  어떤 속 깊은 얘기도 할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의 육성 대화 시간이 그립다. 카톡은 대화가 아니다. 목소리 톤과 표정, 지금 말하는 순간의 마음을 알 수 없는 무성의하고 끊어진 짧은 어귀들. 단톡 창에서 수십 분간 메시지를 주고받지만 너와 내가 대화를 한 것 같지 않다. 그냥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은 느낌이지, 네가 요사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나마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너와 내가 아직은 연결되어 있음을 그제야 실감한다.


눈이 오면 근처 공원에 가져가서 타라고 한 독일인 지인이 썰매를 빌려주셨다. '크고 튼튼하니 어른도 즐길 수 있을 거다.' 연배가 나보다 훨씬 위인데도 '썰매' 단어에 눈을 반짝거리며 얘기하셨다. 집 앞에 서서 짧은 대화에 오롯이 집중했다. '어제 남편이 등산을 하러 갔고 난 집에서 쉬었다. 따뜻한 차도 내려 마시며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이렇게 충만한 시간을 너도 보냈으면 한다.' 카톡으로 주고받은 대화라면 금방 잊혀졌을 것이다.



오래간만에 사람들이 모였다. 얼굴을 보니 일단 반갑다. 하지만 이내 대화에서 한걸음 멀어져 버린다. 수시간 대화를 하고 있지만 상대방의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를 모두 듣고 있으면 이내 귀가 피곤해진다. 내 얘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건 사람의 관심사는 배타적인 '상대방'보다 '나' 혹은 '나'와 연결된 세계이다. '나'가 강제로 배제된, '나'가 전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에 대해 너무 오랜 시간 토로하듯이 꺼내는 말에 집중할 수가 없다. 


한편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지만 오랜 친구처럼 만나는 게 고마운 만남과 대화가 있다. 만나자마자 자기 얘기를 내뱉는 사람이 아니다. 만나면 상대방인 '나'에 대한 스토리를 먼저 묻는다. 열심히 경청해주는 상대방에게 글을 쓰듯 내 얘기를 한다. 자기의 소중한 시간을 내 얘기를 들어주는데 쓴 상대방에게 고맙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글을 쓰듯 내 스토리를 들어줄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이 얼마나 있는지 가늠해본다. 그 사람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가 되기를, 시간에 내쫓겨 나를 내쫓지 않기를 바래본다.

 



손으로 쓴 엽서나 편지를 주고받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친구들과의 편지 감성은 중학교 때 최고였다. 편지를 거의 매일 써서 주고받았다. 예쁜 편지지에 예쁜 펜으로 예쁘게 썼다. 여느 글과 마찬가지로 기쁠 때보다 서운하거나 슬플 때 편지의 왕래 횟수가 많았고, 속을 탈탈 털어 한번 주고받으면 얼싸안고 화해를 하기 참 쉬웠다. 가장 최근에 받아본 엽서는 독일인 친구가 여행하다 보낸 것으로, 그것도 몇 년 전이다. 유럽인들의 감성은 나이가 들어도 지속되는 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대학 시절 한 강의실에서 강의를 듣는 태도는 천태만상이었지만 대략 세 부류로 나뉘었다. 앞 줄에 앉아 정말 열심히 손 필기하는 성적이 순위권인 여학생들, 필기는 해야겠지만 글씨체가 엉망이거나 귀찮아서 노트북에 타이핑을 하는 부류, 턱을 괴거나 팔짱을 끼고 들리는 것만 듣는 부류. 나는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부류를 오갔다. 시험이 가까오면 턱없이 부족한 내 필기에 기겁하며 가장 친한 친구의 예쁜 손 필기 노트 혹은 성적 순위권 여학생들의 손 필기 노트에 기생했다.

노트북 타이핑도 얼핏 보면 적극적으로 강의를 듣는 방법 같지만, 손 필기는 뇌를 다르게 쓴다. 노트북 타이핑은 그냥 들리는 '말' 그대로 옮기는 과정이라 뇌를 적극적으로 쓰지 않는다. 수동적이다. 그에 반해 손 필기를 하려면 듣고 이해하고 내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뇌 사용 경로'가 다르다. 시간이 더 걸리지만 그 걸린 시간만큼 지식이 숙성하고 배움은 깊어진다는 걸, 의대 생활이 끝나고서야 알았다.

 



코로나 판데믹이 한창인 현재, 세계 공통의 제일가는 방역 지침은 '사회적 접촉의 최소화'이다. 워낙 강력한 메시지로 세뇌당한 지금, '손 씻기'보다 더 우위에 있는 지침이다. 물론 디지털 방식으로 외부와 접선하고 있지만 근무, 수업, 회의가 주목적이다. 사회적 고립은 심리적인 스트레서로 작용하여 자율 신경 중 교감 신경 기능을 항진시키고, 결국 심장과 ''에 부담이 된다. COVID-19에 감염이 되면 체내의 과도한 염증 반응이 예후를 결정하는데, 심리적인 스트레서가 좋을 리 없다. 지나친 사회적 거리두기를 자제하고 수위를 조절하려고 고심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경제에 대한 염려가 가장 크겠지만) 결론적으로 현재의 방역 지침은 꼭 필요하면서도 모든 지구인들의 '뇌'가 싫어하는 방식일 것이다.


뇌는 시각 중추, 청각 중추와 언어 중추를 전방위로 종합할 수 있는 아날로그 방식을 더 사랑한다. 가끔은 일부러, 아님 '치매 예방'을 위해서라도 뇌가 사랑하는 방식대로 살아보길 권한다. 얼굴을 직접 보고 상대방의 표정과 말투를 통해 미뤄 짐작하며 대화의 내용과 언어 표현을 조절하는 섬세함, 나의 진심을 에세이 글로 표현하는 듯한 충만한 대화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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