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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ist 전문의

Range,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by 데이비드 엡스타인


신경과 전문의가 직업 타이틀이지만 사실 난 제너럴리스트다. 신경과에도 여타 다른 과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분과들이 있다. 뇌졸중, 치매, 이상운동, 뇌전증, 수면, 신경이학, 두통, 말초신경은 펠로우(전공의 과정을 마친 전임의) 과정까지나 해당되는 분과이지 실은 나뉘고 계속 나뉜다. 나도 이 분과들 중 하나에 몸을 담고 펠로우 과정을 밟으며 깊은 전문성을 향하여 단련했지만 방향을 틀었다.


내 성향은 한 곳을 파는 것보다 두루 걸치는 게 좋았다. 일부러 제너럴리스트의 길을 택했다. 하지만 아직도 제너럴리스트의 입지는 좁다. 어떤 곳에서 일하건 '특화 분야'가 뭔지 묻고 특화 분야를 키울 것을 요구한다. 특별히 잘하는 파트가 있어야 환자들이 찾는다는 게 요지다. 물론 대학병원같이 의료 전달 체계의 상위에 있는 그룹은 전문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전문화된 것이 좋기만 할까? 협진 네트워크는 많은 시간과 기다림을 요하고 있다.

현재의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더 갈고닦기 위해 학회를 조직하며, '더 특화되기 위해' 가지를 치고 학회 모임은 세부 모임으로 계속 나뉜다. 한동안 두통과 어지럼증을 파다가 오래간만에 치매 학회 모임들을 기웃거리면 생소한 부분이 많다. 이게 뭐라고 이 작은 세계 또한 빅뱅과 같다. 서로는 계속 멀어져 가며 난 저 멀리 동떨어진 은하수 발끝에서 허우적댄다. 난 두루두루 알고 싶은데? 하나만 파면 지루하고 재미없는데? 나의 심리적 저항을 변호해주는 책을 찾았다.




이 책은 폭넓은 관심과 지적 호기심을 지닌 늦된 제너럴리스트에 대한 예찬론이다. 좋게 말하면 관심사가 다양하고 호기심이 많은 것이고, 좀 깎자면 이 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보내다가 뒤늦게 한 곳에 정착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또한 훌륭한 육아서이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시작할지 선행 학습과 조기 교육이 정석인 시대에, 그 길이 싫은 부모들의 마음을 합리화시켜줄 수 있는 책이다. 일찍 애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한 길을 선택해 고수하도록 하는 게 최선일까? 재능이 안 보이면 어쩌지? 내가 우리 아이에게 섣부르게 방법을 알려주고 유도했다가 그게 아니면 어떡하지. '조기교육'은 종교로 굳어가는 추세이고, 선행 학습 사교육을 시키지 않으려면 귀를 닫고 굳건하게 마이 웨이를 걸을 수 있는 심지가 있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선행을 유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찍부터 한 분야를 파고들면 먼저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기의 집중적인 훈련이 결실을 맺은 케이스는 스포츠와 음악계에 많다.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실제 우리의 삶은 박스 안에 가지런히 정리해놓은 친절한 환경이 아니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많은 환경을 겪어내는 방법을 선행 학습을 통해 미리 마스터할 수 있을까? 조기에 한 길을 파고 전문가로 고정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본능적인 패턴 인식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영역들은 심리학자 로빈 호가스가 <친절한> 학습 환경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다. 동일한 패턴이 계속 되풀이해 나타나고, 피드백이 극도로 정확하고 대개 아주 빨리 이루어진다. (중략) 1만 시간 법칙과 일찍부터 전문적인 훈련을 시켜서 전문화에 힘써온.. 환경은 친절하다. 학습자가 단순히 그 활동해 매진해 더 나아지려고 애쓰는 것만으로 실력이 향상된다. (중략) 폴가르 자매(체스 신동)의 탁월한 능력도 반복되는 구조에 의존한다... 자동화하기가 너무나 쉽다.
<Range> 중에서.


저자는 직업적 다양성(Range, 책의 제목)을 계발하는 과정이 직선 코스도 계단식 코스도 아니고 돌고 돌아 산만함에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수많은 증거를 인용하여 보여준다. 자신의 역량과 성향을 단번에 알기는 어렵다. 알게 되더라도 그 이전까지 들였던 매몰 비용 오류 때문에 길을 바꾸기 망설이는 사람이 많다. 과연 가던 길을 수정하면 손해일까? 불리한 선택일까? 당장은 뒤처지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만 인생은 길다.


지식의 양은 정말 방대해졌다. 개개인이 다룰 수 있는 전문성에 한계가 온다. 전문화된 집단은 소통하기도 쉽지 않다. 병원에서 분과 간에 협진 제도가 활발히 돌아가긴 하지만 A와 B가 함께 일하기보다 A 업무 따로, B 업무 따로 흘러가는 경우도 많다. 옆을 쳐다보지 않고 각자의 사정에만 집중하는 편협한 태도에 한계가 오는, 우리의 미래는 점점 더 <사악한> 환경으로 움직이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에 인용된 수많은 사례와 논문을 읽어보아야 한다. 관심사의 범위를 넓히고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게 된다. 부모라면 교육관과 방법을 수정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나라 입시 컨설턴트들은 방향성 있게 포트폴리오를 작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구난방식 경험의 나열은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고, 설정된 목표를 향한 몰입을 '선형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10대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일까? 왜 꿈과 목표를 일찍부터 강조하는 것일까? 미리 계획하지 않고 좀 더 살아보면서 파악할 수 있게, 그때그때 해나가면서 배울 수 있게 기다려줄 수는 없을까? 어른들이 겪는 세계는 모호하고 불규칙한 과제로 가득 차 있는 걸 알면서도, 아이들에 대한 교육관은 왜 이렇게 경직된 걸까.


의사라는 직업 자체도 저자의 관점에서는 반복적인 패턴 인식이 주된 업무 역량이다. 자동화되어 인공 지능에 의해 대체될 운명의 후보에 들어가는 것이다. 현재 의료 행위의 근간은 '근거 중심 의학'이다. 근거의 정점에 있는 무작위 연구(Randomized controlled study)와 메타 분석의 결과를 바탕으로 진료하고 연구한다. 통계적으로 유의한 범위에 속하는 근거가 이론의 핵심이지만, 정규 분포 곡선에서 한참 떨어진 케이스를 매일 마주하는 게 의료현장이다. 이 약을 처방하면 증상을 멈출 수 있는 확률이 80%나 되는데도 반대의 20%에 해당되는 환자들에게 '평균적'이고 '반복적인' 진료 행위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경우가 친절하지 않은', 익숙한 해답이 없는 진료 환경에서 어떻게 더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한 우물을 파지 못하는 자신이 끈기가 없음을 탓하기도 했다. 하지만 명확한 목표 제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많다. 포기하지 말라는 격언은 진작에 진부해졌다.

익숙한 도구와 지식을 잠시 옆에 치워놓고 다른 세계를 염탐하며 끊임없이 지적 범위를 넓혀보는 것이 좋겠다. 여행도 다니고, 글도 써보고, 생각이 방황하도록 내버려 두는 법이 필요하다. 항상 혼신의 힘을 다해 살 필요는 없으며, 속도를 늦춰 지그재그 걸어보는 것이 좋겠다. 불필요한 경험은 없다. 예기치 않았던 경험이 예기치 않았던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훈련받지 않은 것을 새로 익혀보고, 그동안 경험했던 세계와 모순되는 듯한 세계에도 발을 담가봐야 한다. 한 우물만 파는 전문가가 되는 길은 AI(인공지능)와 가까워지는 길일뿐이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매일 변한다. 현재의 내 생활은 수년 전에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년의 나도 지금과 다를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미리 알 수 없고, 겪어가면서 알게 된다. 새해 계획, 이번 주 계획, 매일의 계획, 고정된 계획이 효율적이고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미리 알 수 없는 나를 틀 안에 한정 지어 가둘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현재에 충실하라는 결론으로 돌아온다. 현재 내가 택할 수 있는 '나에게 가장 적합한' 선택지를 융통성 있게 골라보는 게 좋겠다. 당장은 눈 앞에 닥친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할 수 없으니 지켜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사람은 저마다 발전 속도가 다르다.
그러니 누군가를 보면서 자신이 뒤처져 있다는 느낌을 받지 말기를.
당신은 자신이 정확히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조차도 모를 수 있다.
<Range>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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