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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마음가짐

어떻게 일할 것인가 (2007) by 아툴 가완디


나이 마흔을 넘기면 더 많은 것이 명쾌해지고 주저함이 없을 줄 알았다. 불필요한 생각의 싹을 잘라내고 머릿속 잡념을 실속 있게 정렬하는 게 여전히 어렵다. 자칭 '안식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병원에서 일하면 이전보다 더 잘할 수 있을지, 여전히 자신이 없는 부분이 많다.  


'아툴 가완디'는 미국에서 실력 있는 외과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다.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이란 책을 통해 저자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가 내놓은 책들은 일관성 있게 현대 의학의 업과 실을 성찰하여 의사들에게 귀감이 된다. 글감은 의학과 병원, 의료진의 삶을 토대로, 질문을 던지고 성실하게 답을 찾아간다. 책에서는 일을 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성실함, 올바름, 새로움의 세 가지 측면에서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례를 인용한다.


아툴 가완디는 글에서 인용하는 사례를 직접 캐고 다니는 성실한 작가이다. 전 세계 소아마비의 재발 위험이 있는 지역을 대상으로 세계 보건 기구의 소탕(감염 위험이 높은 어린아이들을 예방 접종 조치) 작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직접 해당 지역 파견 의사와 동행하였다. 또한 관심이 있는 의료 소송의 판결, 원고 측과 피고 측의 입장을 모두 들어보고자 방청석에 앉았다. 미국의 사형 제도에 참여하는 의료진들을 수소문하여 대화를 이끌어냈다.   


종합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한 달에 외래 진료 환자 수는 천 명을 훌쩍 넘는다. 월급을 받는 봉직의 주제에 초진 예약 건수를 조절할 수는 없으니 예약이 되는 대로 다 받아서 본다. 재진 간격을 넓혀 하루에 보는 환자 수를 조절하고 싶지만, 자주 봐주고 싶은 환자 수는 늘어만 가고 결국은 재진 슬롯을 가득 채우게 된다. 평균 5분 간격으로 환자를 보다 보면 내가 가운을 입은 '진료 머신'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5분 간격으로 비디오를 되감는 기분, 내 머릿속 알고리즘대로 진단과 치료를 기계처럼 수분 간격으로 반복하는 경우엔 일이 힘들어진다. 효율을 위해 반복은 꼭 필요한 요소지만, 의미 있게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 반복은 적당해야 한다.


앞서갈 수 있는 혁신적이고 유능한 능력이 없는 사람, 하지만 조금만 틀어서 근무의 일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에게 필요한 얘기를 해주는 책이다.




# 성실함, 기본기의 중요성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직무 환경에서 '성실함'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눈에 띄지 않는 미덕이지만 수년간 꾸준히 간직하기 어려운 녀석이었다. 일 년 동안 별 탈 없이 정해진 시각에 성실하게 출근하는 것, 환자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성실히 듣는 것, 진단과 해결책을 성실히 고민하는 것, 최신 의학 지견을 성실하게 습득하는 것, 성실하게 병실 회진을 도는 것, 성실하게 내 월급을 받는 것. 일탈과 슬럼프의 유혹은 수시로 찾아오지만, 위험 부담이 있고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병원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성실함이었다.


한국이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방역에 선방한 것은 대단한 치료제 덕분이 아니다. 손쉬운 해법 혹은 대단히 혁신적인 첨단 기술과 치료 방법이 우리를 코로나로부터 막아준 것이 아니다. 성실하게 손 씻기, 성실하게 마스크 쓰기, 사회적 거리 유지와 같은 핵심 방역 지침은 코로나 판데믹 이전부터 유행성 호흡기 감염에 대비하는 기본기였고, 그 기본기는 이번에도 중요했다. 자동차 이동형 선별 검사소, 무증상과 경증 환자를 위한 생활치료센터와 같은 독창적인 방역 모델도 현장을 성실히 분석한 결과물이다.

문제를 해결할 대단하고 극적인 변화를 기대했지만,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주는 시기였다. 향후에도 전 세계 인구의 1%를 휩쓸 전염병이 또 찾아올 수 있다. 첨단 치료제와 백신을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방역 지침을 성실히 준수하는 것은 물론이요, 의료 인력과 시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활용할 수 있는, 기존에 가지고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시스템이 절실하다. 신속한 진단 키트와 추적 시스템도 3차 코로나 유행을 막지는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결정적인 건 병상과 중환자실 부족 문제, 의료 전달 체계 - 기본기의 문제였다.


# 태도의 올바름, 책임감

성실함의 여부는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지만, 올바름의 여부는 쉽게 드러난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으면 배울 수 없는 부분이다. 수련 기간에는 전문 지식과 스킬을 열심히 연마하다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 격식, 관계 설정이 어긋나 사면초가에 빠지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환자를 대할 때 얼마나 허물없이 대할지 혹은 얼마나 격식을 차릴지, 얼마나 과묵할지, 얼마나 터놓을지. 얼마나 저자세를 취할지,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굴지, 얼마나 타산적일지까지 신경 써야 한다. (중략) 의사와 환자의 유대는 약속과 신뢰, 그리고 희망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사적인 관계다. 좋은 의사가 된다는 게 비단 의료 행위와 통계의 문제만은 아니다. 의사는 잘할 뿐 아니라 올바로 해야 한다.
<어떻게 일할 것인가> 중에서.


의사가 충분히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던 어떤 실수를 저질러 환자가 피해를 입었을 때, 정당한 책임을 지우기 위해 소송을 하고 소송을 당한다. 의료 소송으로 한순간에 구속이 되기도 하고, 의사들의 밑바닥까지 뒤흔들어 놓기도 한다. 의사도 사람이고, 그래서 부주의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부주의했다고 범죄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환자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보험 혹은 소송 등을 거쳐 피해를 보상받기까지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비된다.

대형 병원은 소송에 대비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만, 중소 병원의 의사들은 개별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의사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금전적인 책임을 지는 용기를 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피해를 보상해주되, 신뢰를 대가로 치르지 않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실수할 때마다 양측 모두에 고통을 유발하며 보상을 받아내야 할까. 환자들의 피해를 길고 지난한 소송으로만 구제하는 시스템은 수정해야 한다. 서로에게 적의를 품어 신뢰에 생채기를 내는 것이 결과적으로 어떤 이득이 있을까.


뇌혈관 질환의 위험도를 상당히 낮추고 건강한 노후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지금의 1차 예방과 2차 예방약 사용 지침, 혈관 중재 시술이 처음부터 손쉽고 완벽하게 자리 잡은 것이 아니다. 임상 연구를 이해하고 참여했던 결정, 부작용 가능성에도 시술을 동의하는 과정,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결정을 감내했던 역사가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과 합병증을 둘러싼 의료 사고에 무조건 소송의 칼을 들이댄다면 소신 진료는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영역으로 연구의 발걸음을 주저하게 된다.


# 돈에 대한 올바름

환자들은 다양한 보험을 들지만 적용 가능한 범위와 약관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진료에 대한 청구 즈음에서야 해당 내용을 파악하고, 청구에 대해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일에 대해 담당 의사와 상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환자와 기분 좋게 돈 얘기를 할 수 있는 의사는 거의 없다. 의료 행위의 일차 목적은 건강과 안녕이며, 돈은 부차적인 문제라 주객이 전도되길 꺼려하는 의사들의 태도가 위선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의사에게는 사업 능력이 없으며, 본인의 직무 수행과 돈을 연결 지어 생각하기를 꺼려한다.

하지만 일반 종합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환자들의 돈 문제에 모르쇠 태도를 유지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청구 관련하여 문제를 얘기하면 나름 열심히 들어줬다. 진단명을 바꿔달라는 황당한 부탁에는 호응하진 않았지만, 질환의 진단과 치료의 적정성에 대한 청구서류를 성실히 작성했다. 내가 했던 진료의 적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합당하지 않은 질문을 하는 등 선을 넘는 보험 회사에 문제를 제기하며 수개월 싸우기도 했다. 환자의 친척과 친구로 가장하여 들어오는 보험 회사 직원들의 질문에도 답을 했고, 최대한 환자 편에 서서 청구를 받을 수 있게 도왔다.

불필요하게 도수 치료를 받으면서 실손 보험료를 챙겨가는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지불한 보험료 이상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 푼도 챙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진단검사를 제안하면 입원을 해야 실손 보험료를 탈 수 있다는 말이 거북하다가도 환자들의 경제적 현실에 수긍하고 타협하게 된다.


의사들이 돈과 비용 문제에 과도한 관심을 쏟게 된 것은 바로 의료보험제도 탓이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행위별 수가제로 내가 시행하는 의료 행위의 가치를 고가 혹은 저가로 가치 매김을 하는 것에도 예민해져야 한다.

종합 병원 의사가 돈벌이도 해야 하는 것은 내가 쓰는 비용과 관련이 있다. 진료실 임대료, 진료실 부대시설 비용, 진단 기계 비용, 전기 사용료, 같이 일하는 병원 동료들의 월급 등의 비용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받을 월급만큼만 벌어서는 안 되는 것도 의사의 현실이다. 의사들의 능력은 돈벌이와 상관없지만 의료는 순수 학문이 아닌 현실의 경제 이론과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이기에 사업 머리도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의료 윤리와 대척점에 있어서도 안된다는 걸 고려하면서도 말이다.


보험과 수가 문제에 항시 불안한 것도 사실이지만, 의사들보다 월급이 더 적은 전문직들도 있다. 남보다 많이 벌기 위해 애쓰는 동료 의사들에게 어떤 입장을 견지해야 할지, 의사들이 응당 받아야 할 대가에 대해 사보험사가 개입하여 자신의 전문성까지 해 집는 걸 왜 묵과해야 하는지, 의사들은 매 진료 순간 책임감, 도덕성, 경제성 사이에서 갈등한다. 환자의 건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노동에 대한 대가도 제대로 받고 싶은 마음도 당연하다. 

올바로 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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