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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그리고 관계

12월, 2권의 책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by 추혜인

제목이 직설적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책이지만 내용은 전혀 불편하지 않은, 병원을 둘러싼 인간사에 대한 공명으로 가득한 책이다. 저자는 의대 동기로 현재는 의료 협동조합을 통해 개원하여 지역 사회를 위한 가정의학과 주치의로 열심히 뛰고 있다. 언니는 학창 시절부터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며 바쁘게 살았던 '센 언니'로 기억된다. 20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때 당시 언니랑 몇 마디라도 더 나눴다면 내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조금 더 넓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즘이 우리 동네를 더 건강하게 만들 거라' 믿는 언니는 의료에 소외된 주민들을 위한 안전한 펜스를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의료에 소외된 사람이냐는 단순히 젠더, 연령, 계층의 문제가 아니다. 의사도 환자의 신뢰를 통해 소신 진료를 할 수 있고, 환자도 의사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진정성 있는 의료에서 모두 다 소외되고 있다. 의료 공급자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거울삼아 각자의 스텐스를 돌아볼 수 있고, 의료 이용자 일반인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상호 간의 신뢰 관계,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을 돌아볼 수 있다.


언니의 가장 큰 특색은 '왕진'하는 의사라는 점이다. 신경과 환자분들 중에 거동이 불편하여 병원에 올 수 없는 분들이 꽤 있다. 그냥 병원이 싫어서 오지 않는 환자, 각종 물리적 장벽으로 모시기 귀찮은 보호자들 요인도 있다. 하지만 장기 요양 소견서 발급을 위해 내원했는데(환자 분이 꼭 내원해야 한다) 골반뼈가 굳어 휠체어에 앉기조차 힘들어, 수십만 원 비용을 들여 사설 앰뷸런스 스트레쳐카에 누워서 진료실로 내원할 때면 안타깝고 당황스럽다. 우리나라에 왕진 시스템이 미비한 이유는 시간과 교통비에 대한 수가 문제가 크다. 왕진을 나가면 3-4시간은 훌쩍 소요될 텐데 8-11만 원 정도, 대략 1시간에 2.5만 원으로 주변에서 이용하는 서비스 비용과 비교해보면 건강 생명과 관련된 서비스의 저렴도를 파악할 수 있다. 왕진 주치의 제도는 제대로 정착만 된다면 이상적인 시스템이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언니는 그 과정을 위해 고민해왔던 바들을 진료 실화와 함께 너무 무겁지 않게 풀어냈다.  


사실 관계를 따져 취조를 하려 해선 안 된다... 진료실 의사 앞에서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환자의 욕구를 이해해야 한다. (중략)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과 맺고 싶은 관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분도 '자신의 담당 주치의'와 맺고 싶었던 관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 관계의 선을 내가 너무 순식간에 아무러지 않게 넘어버렸던 것이.. (중략) 환자들의 얘기는 가만히 들으면 대부분 진단명이나 해결책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중략) 치매는 분명 뇌의 퇴행성 질환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질환이기도 하다. 인지 기능 장애가 있어도 충분히 지역사회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고..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중에서)


2-3년간 치매 환자와 보호자의 동행이 부쩍 늘었다. 환자-보호자 두 사람의 관계가 미묘하게 틀어져 있거나 안 좋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진료 내내 입을 다물고 있는 치매 환자들,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애처럼 타박하거나 악화된 인지기능 검사 결과에 한숨을 쉬는 보호자들, 치매 부모를 사이에 두고 내 앞에서 대놓고 다투는 보호자들을 마주하면서 '치매의 사회적 정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60세 이상의 고령자들이 30%가 넘는 20년 후엔 하나 건너 이웃집에 인지기능이 떨어지는 분들을 마주할 것이고, 그때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치료를 위해 과도한 비용을 지출하는 대신에, 감퇴하는 인지기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각자의 역할유지할 수 있는 포용적인 시스템이 필요할 것이다. 기억력이 좀 떨어지는 게 대수인가, 사람 구실을 하며 자존감을 유지하며 살기를 모두가 소망하고 있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의 긴장도는 의료 정보의 차이에서 온다. 내가 모르는 것을 쏟아내는 사람을 처음부터 신뢰하기는 쉽지 않다. 환자 입장에서는 의사가 정말 필요해서 검사를 권유하는 건지 수익을 위해 검사를 하자고 하는 건지 신경을 곤두세우기 마련이다. 어떻게 해야 이런 긴장감을 해소하고 신뢰 관계를 쌓을 수 있을지, 해결의 팔 할은 시스템의 몫이다. 하지만 거시적인 시스템이 하루 70명의 각기 다른 불평과 고통에 대해 안타까워해 줄 수는 없다.

병원에 즐거운 얘기를 하러 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력이 좋고, 눈높이에서 얘기를 잘 들어주고, 다양한 치료 옵션을 투명하게 제시하고, 치료 과정에서 환자를 소외시키지 않기를 서로가 바란다. 부끄럽게도 대단한 소명 의식은 없지만, 적재적소에 필요한 의사 구실을 하고 싶은 나 같은 사람에게 진정성 있는 고민거리를 주니 고마운 책이다.   


Conversations with Friends by Sally Rooney 

'Normal People(2018)'이 드라마와 책으로 인기몰이를 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작가의 2017년 데뷰작이다. 원서가 어렵지 않다는 말에 혹하여 두권 다 원서로 읽었는데, 정말 생각보다 쉽다. 해리포터보다 쉬운 영어 표현으로 소설의 줄거리, 특유의 분위기와 감성이 잘 전해지니 신기했다. 표현은 쉬우나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는 많은 것 같다. 나보다 10년은 젊은데 영문학, 정치, 철학, 고전 등 많은 주제에 통달한 거 같고 프로필 사진을 봐도 똑똑해 보인다. 사람 간의 관계, 사랑, 우정, 진실의 의미, 계급의식, 동성애 등 내가 일일이 이해할 수는 없으나 마치 이해한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을 하게 해주는 편안한 스토리다.

주인공들은 대개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 부자이지만 가족과 불화를 겪거나, 정상적인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쩐지 외롭거나 우울하다. 배경은 단출하며 이야기의 구성도 심플하다. 복잡 요란하고 팬시한 무대가 아닌, 내가 몸담고 있는 현재의 연장선을 보는 듯한 친숙함과 편안함으로 읽힌다.

하나의 관계와 대화에서도 많은 의미를 끌어내니 흡입력이 있다. 사람 심리와 행동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짧은 호흡으로 단숨에 읽힐 정도로 응축력이 있고, 어떤 문장은 한 줄이라도 기가 막힐 정도로 예민하고 정확하다.

마음 한구석이 왠지 모르게 산만하고 헛헛해서 복잡하고 어려운 책이 잡히지 않을 때 읽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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