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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어떤 사람일까.

마거릿 애트우드, <그레이스>


성애와 폭력과 하류층의 유감스러운 반항, 이 세 가지 조합은 그 당시 기자들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인 소재였다. 19세기 내내 언론을 장식했고, 여론은 계속 둘로 나뉘었다. 그녀에 대한 태도는 당시 여성의 천성을 대하는 이중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범행을 부추기고 낸시 몽고메리를 실질적으로 살해한 악마의 화신이자 요부였을까 아니면 맥더모트의 협박과 자기도 목숨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희생양이었을까?
<작가의 말> 중에서


최근 몇 개월간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에 빠져 있었습니다. <시녀 이야기>, <증언들>, <그레이스>까지 무거운 주제를 섬세하고도 두텁고 대담한 묘사로 표현해내는 그녀의 필력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1843년 부유한 집주인 토마스 키니어와 가정부 낸시 몽고메리가 끔찍하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그레이스>는 그 유명한 사건의 용의자 '그레이스 마크스'의 실화와 그녀에 대한 장대한 보고서들을 참고로 만든 소설입니다. 그레이스는 열여섯의 나이로 체포되어 30여 년간 감옥 생활 후에 사면 선고를 받았던, 당시에 매우 핫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그레이스'의 실제 성격은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그레이스가 유죄냐 무죄냐 혹은 정신질환자였느냐 아니냐 양측의 입장을 모두 다루면서, 작가는 끝까지 결론을 내주지 않습니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페미니즘 작가로 평가받아왔고, 기존의 여러 작품에서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데 충실해 왔습니다. 이 소설 또한 현시대의 젠더 이슈의 연장선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지만 작가는 하나의 메시지만을 전달하지 않고 결론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좌) 넷플릭스 드라마 속 그레이스, 파란 눈이 정말 매력적이죠. (우) 용의자로 체포 당시 실제로 그려진 두 용의자의 얼굴. 그레이스 마크스는 메리 휘트니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소설의 큰 틀은 정신과 의사 사이먼 조던 박사와 그레이스의 대화로 이루어집니다. 아름다운 파란 눈을 가진 그레이스의 독백을 듣고 있으면, 맥더모트(같이 용의자로 체포되었던 남자)의 모함과 부당한 사법제도의 희생양이 되어 30년 인생을 감옥에서 썩힌 불운한 여자입니다. 하지만 후반부에 신경 최면술을 받는 와중에 터져 나온 그레이스의 또 다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 여자가 범인인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속였구나 탄식을 하게 됩니다.




그레이스는 불운한 가정사와 폭력적인 아버지 탓에 어린 나이에 하녀 일을 시작했지만, 성실하고 낙천적인 메리 휘트니와 동료애를 나누며 서로에게 버팀목이 됩니다. 하지만 메리의 충격적인 죽음을 통해 하층민 여자의 현실을 깨닫고 자기는 자기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억척같은 생활 감각으로 살아냅니다. 키이라 나리 댁에서도 성실히 자기 몫을 다했지만 결국 운명은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갑니다.


문을 잠그든 안 잠그든 조만간 들어올 방법을 찾을 거라는 걸 알았어요.
어떤 주인은 하녀가 종일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방안에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죄인이 되죠.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 그레이스의 독백, 메리 휘트니의 죽음 이후


그레이스가 조던 박사에게 하녀의 일상을 풀어놓을 때, 조던 박사는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며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됩니다. 억압적이던 다른 전문가들과 달리 그녀의 페이스대로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간직했던 그레이스, 바느질 등 손재주가 뛰어나고 성실하게 일했으며, 자기를 야무지게 지킬 줄 알았고, 상황을 기민하게 판단하고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을 자주 인용하는 도덕적인 품성에 매력적인 외모까지.. 조던 박사와 함께 독자들도 시청자들도 그녀의 파란 눈과 차분한 목소리에 빠져듭니다.  


(좌) 그레이스에게 사주받았다!고 외치는 맥더모트. (우) 그레이스에게 매우 진지한 사이먼 조던 박사.


맥더모트가 자신에 대해 거짓 증언을 했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가정부 낸시 몽고메리의 상황을 시샘하여 자기에게 살인을 부추겼다고 증언한 맥더모트의 진술의 신빙성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은 캄캄하고 가는 길을 밝혀 줄 달빛조차 없어요. 교수형을 받는 그 길이 두려웠을 텐데 혼자 가기 외로워서 자기와 같이 가길 원했을 거예요.
죽은 사람을 비난하는 건 옳지 않고, 외로워하는 인간을 비난할 수는 없어요.
- 그레이스의 독백, 맥더모트에 대한 심경

 

조던 박사는 번뇌하고 독자들도 계속 의문을 갖습니다. 그레이스는 유독 살해 현장만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재판장에서도 두 번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인간적으로 그레이스에게 끌리면서도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는 그레이스가 정신질환자 흉내를 내는 노련한 미치광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 핵심 부분에 대한 기억만 오롯이 파낸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충격으로 인한 기억 상실증이냐,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느냐. 그레이스의 진실된 태도 이면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던 사이먼 조던 박사 역시 번뇌와 자기 분열, 위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신의 은총이 내렸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면, 지옥에 떨어지거나 구원을 받는 것이 내 소관이 아니니 모든 걸 깡그리 잊고 자기 할 일이나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이 엎질러졌는지 어떤지 하느님만 알 수 있고 치우는 것도 하느님만 할 수 있다면 엎질러진 물을 놓고 울어 봐야 소용없는 거 아니겠어요? (중략)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정색하고, 깨끗이 씻은 손에 장갑을 끼고, 모든 이야기를 준비해놓은 일요일에만 하느님에게 신경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구나. 하지만 하느님은 도처에 존재하고, 인간처럼 가두어 둘 수 없는 존재인 것을.
- 그레이스의 독백, 인간의 위선에 대하여


그레이스에게 신경 최면술을 펼치는 뒤롬 박사의 장면에서, 철학적이고 신경과학적인 질문을 떠올립니다.

보유하고 있는 기억이 다른 두 개의 인격체가 하나의 몸에 공존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실질적으로 전혀 다른 두 사람일까. 그레이스의 다른 목소리는 너무나 폭력적이어서 목격하던 모두가 충격을 받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쉽게 받습니다. 행동을 관찰해서 모방을 하든, 나만의 것으로 변형을 하든 그 형태는 다양합니다. 더 나아가 타인의 생각을 따르고 그들의 생각과 욕망이 곧 내가 됩니다. 기사의 댓글을 보고 수 초도 안되어 내 생각으로 치환합니다. 이런 인간의 능력은 타인에게 적절히 공감하여 사회생활을 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나'를 구성하는데 타인은 중요합니다.


뇌졸중으로 언어 장애를 겪는 사람은 여전히 본래의 자아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중증 치매를 앓는 할머니가 사랑하는 가족을 기억하지 못하고, 온화했던 성품 대신에 폭력적인 언행만이 자리하고 있다면 할머니는 더 이상 내가 알던 그분이 아닐까요?

내가 쓰는 언어와 기억이 모여 '나'를 구성한다면 이 중에 어느 한 부분이 누락된다고 해서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10세 때의 나와 40세 때의 나는 외모, 말투, 인간관계, 기억 등 대부분의 요소가 다른데도 동일한 '나'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 내가 겪어왔던 수많은 경험치가 따로 놀지 않고 하나의 '나'로 통합하여 느끼는 과정에서 뇌는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아직은 그 세세한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것입니다.




신경 최면술을 받는 그레이스.


신경 최면술을 받을 때 '메리 휘트니'의 목소리로 얘기하는 사람이 '그레이스'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억과 사고, 언어는 메리 휘트니의 것이지만, 살인 행위를 한 육체는 그레이스의 것입니다. 기억에 없는 자신의 행동을 '자아(self)'의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자아(self)가 뇌의 근간에서 오는 개념이라면 그레이스는 뇌질환(정신질환)의 희생양인가, 자아가 분열된 인간인가. 오랫동안 철학이 담당해왔던 문제이기도 하고, 앞으로 뇌과학이 밝혀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레이스는 끔찍한 어린 시절과 하류층 여성으로서 학대를 경험합니다. 그로 인해 억압된 분노가 그레이스의 진실과 관련이 있음을 직시하는 것도 이 작품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스가 사면이 된 뒤 어떻게 살았는지, 그 이후에 관해서는 명확한 사실 자료가 없습니다. 사라진 빈틈을 작가 특유의 세심한 필력과 상상력으로 메워줍니다.

그레이스는 본인을 위해 처음으로 누비이불을 만들어 퀼트 장식을 합니다. 가장 핵심적인 장식에 세 가지 조각을 사용합니다. 메리 휘트니의 빨간색 페디 코트, 누르스름한 교도소 잠옷 수의, 낸시 몽고메리의 분홍색 드레스 조각. 우리의 기억, 우리는 모두 함께 한다는 의미이죠. 그레이스라는 사람이 겪어왔던 경험치가 하나의 '그레이스'로 통합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소설의 핵심 장면입니다. 그레이스가 퀼트 장식을 이불에 기워가는 장면을 읽으며 뇌의 가소성과 통합 네트워크를 상상했던 것은 신경과 의사의 직업병일 수도 있습니다.


이 소설은 독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갖도록 유도하면서도, 메시지가 직접적인 부분도 많아 그리 어렵지 않고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감옥에서 30년을 보내야 했던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여성들에게 좀 더 가혹하고 특수했던 시대적 상황을 묘사하고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분투했던 그들을 남성들과 대등한 입장에 올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때와 얼마나 다른지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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