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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Oct 06. 2022

나를 만든 사람들

커뮤니티 아카이브 양평 | 아신문학클럽  <이번 여름의 일> 중에서

라면수프 국밥

살면서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은 뭐야? 누군가 묻는다면 바로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산해진미와 바꾸자고 해도 바꾸지 않을 만한 것이다. 1998년 가을비 내리던 날.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 중앙역 뒤 갈루스 바르테Galluswarte 다락방에서 먹은 라면수프 국밥이다. 


그 시절 나는 두려움에 떠는 고슴도치 같았다. 작은 말에 상처받고, 가시를 세웠다. 사랑에 목말라 있었던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실수를 저질렀다. 사랑받고 싶어서 한 행동이 누군가를 오해하게 만들었다. 문숙 언니는 그런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도,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고 나를 함부로 판단하지도 않았다. 그는 상처가 모두 회복된 나의 모습을 소망하며 기다려 주었다. 언니는 엄마 같았다. 자기도 가난한 유학생이면서, 살 집을 구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나에게 반년이나 집 한쪽을 내어 주었다. 작은 방과 거실, 가문으로 구분된 좁은 다락방이 언니의 집, 아니, 우리 집이었다. 


첼로 레슨을 망친, 교수님에게 왕창 깨진 날이었다. 힘들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언니는 아껴두었던 라면수프를 꺼냈다. 끓는 물에 수프를 풀고 양파 몇 조각 송송 썰어 넣은 게 전부인 요리. 맵고 짜고 뜨거운 국물 탓이었을까? 아니면 내 마음을 알아준 언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던 걸까? 먹는 내내 자꾸만 눈이 촉촉해졌다. 


세월이 지나 연구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독일에 갔을 때였다. 문숙 언니는 엄마처럼 나를 맞아 주었다. 이제 같이 늙어가는 나이인데도 여전히 언니는 어린아이 챙기듯 나를 살폈다. 나는 꿈에도 그리던 언니 얼굴을 몇 번이고 쳐다봤다. (그동안) 식탁 위에 뭔가 잔뜩 펼쳐져 있었다. 방에서 마실 물, 다양한 선물, 프랑크프루트Frankfurt am Main 시내 어디든 다닐 수 있는 교통카드. 심지어 다음 날 논문 준비를 위해 본Bonn으로 떠나는 길에는 기차표 값을 봉투에 넣어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 


시간 흐른 뒤 언니가 밤마다 나를 위해 울며 기도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왜 그랬을까? 가족도 아니고, 원래부터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었는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나를 품어 주었다. 내가 나를 미워했을 때 언니는 희망을 알려준 존재였다. 모두에게 거절당하는 것 같았던 시절, 언니 품에 안겨 엉엉 울던 날들. 그는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품에 안기면 늘 따듯했다.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넌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고작 양파 몇 조각 들어간 라면수프 국밥을 끓인 밤. 그때 내가 먹은 건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금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다. 


프랑크푸르트 초록 집

 독일 땅을 다시 밟았다. 나의 가장 푸른 시절을 보낸 곳. 유학생활을 7년째 하던 해 몸이 아파 잠시 휴학하고 귀국해야 했다. 그 뒤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꼬박 십팔 년이 걸렸다. 


한국에 돌아온 뒤 몇 년 동안 티브이에 독일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곤 했다. 잔상을 지우고 싶었다. 그리움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독일에 살 때는 그 반대였다. 한국 드라마나 음악을 마주하면 눈물이 흘렀기 때문에 아예 보거나 듣지 않았다. 유일하게 한국을 그리워할 수 있는 날은 방학이 되어 한국에 잠시 들어오기 전날 밤이었다. 그 시간에는 마음껏 그리워해도 행복할 수 있었다. 내일이면 한국에 갈 수 있으니까. 독일에서 한국을 그리워하던 마음이 한국에서는 독일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되어 버렸다. 


오스트리아 빈Österreich Wien에서 태어난 나는 학창 시절 고향에 관한 말하는 순간마다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때만 해도 오스트리아는 생소한 나라였고,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빈Wien에서 다섯 살까지 살다가 한국에 왔다가 청년이 되어서는 독일에 머물렀다. 내 삶은 문틈에 끼인 것 같았다. 한국인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유럽인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나는 경계인이다. 하루하루 부유하는 마음을 달래며 살아야 했다. 어디가 진짜 나의 집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덧 한국에 적응했지만, 여전히 가슴 시린 그리움이 찾아들곤 한다. 어딘가에 소중한 것을 두고 온 마음이랄까. 


독일에 도착하자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이곳에서 칠 년 동안 살았었다. 잊은 줄 알았는데, 골목길 하나하나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독일에 온 지 삼일 째 되던 날,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m Main 시내로 나가 뢰머 광장Römer Platz에서 마인 강Main을 따라 마지막 살았던 집까지 걸었다. 


내가 살았던 초록 집까지 삼십 분 정도 걸었다. 익숙한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물가의 백조들, 다리의 벽화들, 강가의 돌들, 쉬어갈 수 있는 벤치들, 모든 풍경이 그대로였다. 십팔 년 만에 찾아왔는데 몸은 마치 어제 걸었던 길을 가는 듯 자연스러웠다. 풍경은 똑같고 나만 달라진 것 같았다. 문득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다리 몇 개를 지나자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로 가야 내가 살았던 집이 나오는지 헷갈렸다. 몸이 기억하는 대로 가보기로 했다. 걸음에 이끌려 가보니 골목 끝에 나의 초록 집이 보였다. 휴학할 때는 머지않아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곳이다. 아주 오래 머물 요량으로 침대며 책상이며 가구를 새로 사놓았었다. 집이 보이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창문이 보였고 이윽고 울음이 터졌다. 더는 내 집이 아니다. 누가 살고 있는지 알 수도 없다. 왜 눈물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나는 건물 벽을 쓰다듬으며 누군가의 이름이 붙어 있는 초인종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청각과 통각이 예민한 아이였다. 중학생 때는 청소년에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모기 잡는 기계 초음파 소리를 들었고, 작은 상처만 나도 크게 아팠다. 예민한 내게 집은 답답한 공간이었다. 부모가 된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나의 부모님도 최선을 다하셨다는 걸 알 수 있지만, 그때는 견디기 어려웠다. 


아빠는 엄하셨다. 엄마는 책을 읽거나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통금시간은 오후 다섯 시였다. 오래된 회색 단층 아파트는 너무 단단하게 지어져 못질도 잘 되지 않았다. ‘살기 좋고 아늑한 분위기, 친근감이 생기는 집을 한 가족’, ‘집의 본질이자 인간에게 안전과 편안함을 조성하는 불가분의 관계인 가족’이라는 그 아파트의 소개 문구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집이었다.  


독일의 집은 재독 한인 2세들이 북적이는 공간이었다. 나는 그곳이 따듯했다. (아이들에게 우리 집은 언제든 오고 싶을 때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아이들이 우리 집에 오면 좋았다. 외롭지 않게 내 곁에 있어준 아이들의 온기가 고마웠다.) 1960년대 말 파독 광부로 간호사로 독일에 오신, 외화벌이를 통해 우리나라를 일으켜 세운 자랑스러운 분들의 자녀들. 그들은 우리 집에 와서 울었다.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왜 나는 엄마랑 사전을 펴 놓고 대화를 나눠야 하냐고.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열심히 일한 부모님들과 독일에서 태어나 탁아소Kinderkrippe에 종일 맡겨진 몇몇 자녀들 사이 언어와 문화의 틈이 벌어졌다. 더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따스한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부모님과 언어는 같았으나 마음의 온도가 달라 혼자 운 날이 많았다. 가족을 살리느라 늘 바쁜 부모님과 언어와 문화가 달라 외로워하는 2세들은 그런 나와 닮아 있었다. 우리는 초록 집에서 두 번째 가족이 되었다. 누군가 울며 찾아오면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냉동실에 싸구려 피자를 넣어 두었다.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올 수 있는 집이었다. 눈물의 속삭임을 나누었다. 따듯한 이야기가 매일 차곡차곡 쌓였다. 


오랜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그들도 여전히 초록 집을 기억하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로 다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울고 웃던 집을 회상했다. 슬프고 따듯한 시간이 쌓여 이제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한국과 독일을 이어가며 살고 있었다. 


십팔 년 만에 다시 마주한 초록 집은 여전히 따듯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더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누가 살고 있을까? 그 사람에게 이 집은 어떤 느낌일까? 지금 나는 초록 집에 살지 않는다. 이곳에서 울음을 터뜨렸던 친구들은 각자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초록 집 앞에 서서 생각했다. 그들과 함께 했던 따듯한 집을 한국에서도 짓고 싶다고. 또 다른 경계선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과 함께. 


덤으로 사는 삶

살면서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태어나자마자 ABO식 혈액 부적합으로 전신 교환 수혈을 했다. 독일 유학시절 욕실에서, 둘째 아이를 낳은 뒤, 가족 같은 동생이 마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수술하던 날, 나는 정신을 놓고 기절하고 말았다.


쓰러지는 이유를 찾기 위해 여러 병원을 다녔지만 어디에서도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뇌파 검사, 초음파 검사, MRI까지 찍어 봤지만 심장이나 뇌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상이 없다니 천만다행인 일이지만, 원인을 알 수 없어 답답할 노릇이었다. 이제는 쓰러지기 전에 전조 증상 같은 것이 있어서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를 낳은 뒤 새벽에 쓰러졌던 날이 기억에 남는다. 몸이 너무 아파 겨우겨우 욕실에 들어갔다 나오는데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곧 쓰러질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번쩍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너무 차가웠고, 귀에서 쿵, 쿵, 심장소리가 들렸다. 생경한 느낌이었다. 혹시 죽은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눈을 뜨니 바닥의 무늬가 보였다, 입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이가 얼얼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꽤 오랜 시간 옆으로 누워 여러 생각을 했다. 곧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생각의 흐름은 이러했다. 


1. 새벽에 쓰러져서 다행이다. 가족이 보는 앞에서 쓰러졌으면 얼마나 놀랐을까.

2. 그동안 참 감사한 삶을 살았다. 받은 게 많은 삶이었다. 

3. 지금 죽는다면 남겨질 아이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있어 다행이다. 

4. 죽은 후 갈 곳이 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안정을 주는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구나. 죽음이 두렵지 않은 감정은 이런 거구나. 

5. 맡고 있는 일들이 장 정리되어야 할 텐데. 나 말고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 감사하다. 

6. 덤으로 살았던 삶이었다. 감사하게 마칠 수 있어 기쁘다. 


나는 남겨질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점점 몸이 따듯해졌다. 발 끝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손끝에도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살았구나. 일어나서 내가 누워있던 자리를 보니 절묘한 위치였다. 조금만 왼쪽으로 쓰려졌으면 싱크대에, 오른쪽으로 쓰려졌으면 식탁에 몸을 부딪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내가 쓰러진 자리는 싱크대와 식탁 사이, 딱 그곳이었다. 


욕실로 갔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창백했다. 피부는 축축했고, 몸에는 오한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게 아직 할 일이 남아 덤으로 삶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입에 묻은 피를 닦고, 세수를 한 뒤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매트리스의 감촉이 좋았다. 아이들이 쌔근쌔근 잠자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예쁘던지. 다시 듣지 못했을 수도 있는 그 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새 삶을 사는 기분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뺨에 스치는 바람도, 흔들리는 나뭇잎도, 떠다니는 구름도, 심지어 내 앞에 끼어들려는 차도 새로웠다. 살아 있기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짧은 죽음들을 경험하며 살았다. 

누군가 미울 때나, 밀려드는 일에 숨이 막힐 때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면 한 번씩 떠올린다. 그날 밤의 기도와 다음 날 아침의 감격을. 살아 있기에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 감사의 이유라고 되새긴다. 


덤으로 받은 남은 생애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사랑으로 채우고 싶다. 

다른 사람을 위해 공부하고, 일하고 싶다.

매번 다짐하더라도 주는 것보다 받는 게 더 많은 삶이다. 

강의 시간에 둘째 아이를 돌봐주신 둘째 아이 친구 어머니에게, 먹을 게 없을 까 봐 반찬을 싸 들고 와주신 분에게, 엄마 대신 동생 받아쓰기 시험을 챙겨준 첫째 아이에게, 논문 쓰는 동안 따듯한 카페라테를 사다 준 남편에게. 

내일도 눈을 뜨면 모든 게 아름다웠던 그날 아침을 떠올릴 것이다. 

오늘은 기필코 내가 더 사랑하는 삶을 살 거라고. 




지난여름 <커뮤니티 아카이브 양평> 소리 내어 읽기, 소리 내어 쓰기 과정에 함께했다.

곧 다른 작가님들의 글에 숟가락을 얹어 묶여 나오게 될 글들.

지난여름의 시간 동안 글 하나를 완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도움이 필요한지 경험했다.

졸필을 완성작으로 이끌어주신 양주안 편집자님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세심하고 훌륭한 선생님이신 양주안 편집자님의 브런치는 아래를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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