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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Aug 28. 2023

너도 한 눈만 보이지?

붙어만 있으면 괜찮아

장애인. 이 명칭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 오른 눈으로 그 무엇도 볼 수 없고, 두 눈의 시력차가 너무 커서 자주 어지럽고, 두통이 심하다 못해 구토를 하면서도 스스로를 장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우습게도 초등학교 1학년 때 첫 신체검사를 하기 전까지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한쪽 눈으로만 보며 살아가는 줄 알았다. TV 애니메이션에 눈 하나로 얼굴의 절반이 가득 찬 외계인이 나오면 하나님이라는 분은 어차피 한쪽 눈만 보이게 하실 걸 왜 사람에게 저렇게 한 눈을 크게 하시지 않고 눈을 두 개 주셨을까?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한 눈만 보이는 걸 알게 되고 세 살짜리 동생에게 “너도 한 눈만 보이지?”라고 물어보았다. 당시 누나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했던 내 동생이 “응!”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을 해준 후 철석같이 믿고 그 이후 누구에게도 다시 묻지 않았었다.

신체검사 날 시력검사기 앞에 선 아이들이 숟가락 같이 생긴 눈가리개로 왼쪽 눈을 가리고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것을 보고 머리에 지진이 일어났다.


뭐가 잘못된 거지? 왜 저 아이들은 왼쪽 눈을 가려도 글자를 읽는 거지?


어린 시절 학교에서 한쪽 눈을 가리고 양손 검지를 맞대어 보는 놀이(?)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한쪽 눈을 가리면 양쪽 검지를 맞댈 수 없다 했다. 그런데 나는 오른쪽 눈을 가려도 양쪽 검지를 맞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엔 왜 나만 그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초능력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알고 보니 늘 눈을 가린 것 같은 상태로 세상을 보고 있었던 난 당연히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인지’를 하게 된 후 나는 단 한 번도 양 쪽 눈이 다 보이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태어나마자 병원에서 했던 검사에서는 두 눈에 다 시력이 있다고 했다는데, ABO 혈액형 부적합으로 전신교환수혈을 한 후 부작용이 생긴 것인지, 심한 신생아 황달로 적외선 치료를 할 때 시력보호 안대가 떨어져서 그랬는지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두 눈이 다 보이는 건 어떤 느낌일까?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공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머리를 맞지 않을 수 있는 시야는 어느 정도의 범위일까? 운전하다 오른쪽 차선으로 끼어들기 위해 왼쪽 눈을 중앙으로 맞추려 고개를 완전히 돌리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큼 더 안전할까? 3D 영화를 볼 수 있으면 얼마나 더 흥미로울까? 양 쪽 눈이 다 보이면 정말로 화면에서 내 앞으로 상어가 튀어나오는 것 같은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양쪽 눈이 다 보이는 것이 무언지 모르지만 왼쪽 눈을 가려보면 두 눈이 다 보이지 않는 삶은 조금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장애에 감사한다. 시력이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없기에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내가 모르는 삶은 양쪽 눈이 다 보이는 삶, 그리고 양 쪽 눈이 다 보이지 않는 삶이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나의 지극히 작고 주관적인 경험으로만 세상을 이해한다.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알 수 있는 것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매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단편적이고 편협한 것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생각하며 감탄한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기에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비장애인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지하철을 탈 때나 주차 할인을 위해 복지카드를 사용해야 할 때 아래위를 훑어보시는 분들의 눈빛을 느낄 때도 있었고, 실제로 복지카드 사기꾼이 아닌지 검증을 받아야 할 때도 있었다. 어떤 날엔 “장애 6등급도 주차 할인을 받나?”라며 짜증을 내시는 주차장 관리자 선생님을 만나기도 한다.


얼마 전  발목 부상을 입었다. 공연 30분 전 음향감독님께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드리고 내려오는 길 계단 단차를 착각하고 허공에서 발에 무게를 실어버렸다. 발목에서 우지끈 소리가 났지만 공연을 시작해야 했기에 꾹꾹 참았다. 발이 퉁퉁 붓고 바닥을 짚을 수 없어 병원에 가보았더니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었다 했다.

인대는 가만히 둬도 붙지 않기에 수술을 받았다. 단지 발목 수술을 했을 뿐인데 거동이 너무나 불편해졌다. 휠체어는 아무리 잘 운전해도 벽에, 기둥에 부딪쳤다. 조금 나은 후 클러치를 짚고 뭔가를 해보려 했는데 한 손에라도 물건을 들면 걸을 수가 없었다. 한 나절 클러치 생활을 했는데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려 했다. 너무 힘든 마음에 함께 장애에 대한 책을 써보자고 의기투합한, 보행장애를 가지고 살고 계시는 사랑하는 목사님이 생각나 하소연을 했다.


처음엔 그래. 여섯 살 땐가 처음 크러치 짚었을 때

손바닥에 물집 잡혀서 징징 울며 손바닥 껍데기 벗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

여하튼 수술하면 회복된다고 그랬지? “


“네네 재활 다 마치면 6개월 걸린다긴 하지만 낫긴 한대요.

목사님이 너무 보고픈 하루였어요.. “


2박 3일 간병해 주시던 친정어머니가 떠나시고는 드디어 생존을 위한 연습을 시작했다.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스스로 식판을 가져다 두고, 얼음주머니에 얼음을 채워오고, 물을 받아오기 위해, 치료실에 가기 위해, 하루를 살기 위해 열심히 연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휠체어 달인이 되었다. 양손으로 요리조리 방해물들을 피하기도 하고 후진으로 저 멀리까지 갈 수 있었다. 클러치를 짚는 손바닥에도 굳은살이 박여갈 즈음 그제야 스스로를 연민할 시간보다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어떻게 건널까에 주목하는 삶이었다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조금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불쌍히 여기기엔 혼자 해결해야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우리의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목사님과 열 번이나 만나는 동안에도, 각자의 장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한 줄 알았던 시간 동안에도 보행장애가 있는 목사님의 진짜 삶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다.


장애인으로 사는 나의 삶에는 결국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없다.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기쁘게 누리고, 나쁜 것은 받아들이거나, 털어버리거나, 울어버리는 것. 그저 내게 주어진 하루가 기적임을 기억하며 땅에 발을 디디는 것. 그리고 하루만큼의 걸음을 더 걷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감사하게도 1년 전쯤 손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다시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요즘 공연의 마지막 시간에 늘 연주하는 곡이 있다. 그 곡은 Sarah F. Adams의 <Nearer, My God, to Thee>이다. 이 곡은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침몰할 때 연주 된 곡이다. 2340명이 탑승했던 타이타닉 호는 구조선 부족으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상황 속에서 유람선 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 웰레스 하틀리는 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악기를 덮었던 나머지 8명의 단원들도 다시 케이스를 열었고 함께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직전까지 연주를 이어갔다. 아수라장이었던 배는 연주와 함께 차분해졌고, 어린아이를 비롯하여 약한 자들을 차근차근 먼저 태우고 남은 1500여 명의 사람들은 그 선율을 들으며, 조용히 합창을 시작했다. 그들은 함께 마음을 모아 노래하며 침몰 전까지 자신 앞에 주어진 생을 끝까지 살 수 있었다.


암벽에 오르던 사람도 중간에 맥이 풀어지면 잠깐 쉬기도 한대
붙어만 있으면 괜찮아
<최지인,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2022, 창비, 기다리는 사람 중>


인생길을 걷다 보면 죽을 만큼 힘든 시간들이 찾아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뭐 그거 가지고 그래?”라고 하는 일이라 해도 스스로에게 그 일은 100% 힘든 일이다. 이해받고 싶지만 그 누구도 나를 100%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각자의 인생에 너무나 외로운 순간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눈이 보이지 않아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겪으며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은 푸념, 원망, 폭발, 체념, 절망, 포기와 같은 형태로 내 마음을 헤집었다. 내 눈은 앞으로도 영원히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수술도 할 수 없다는 팩트, 사는 동안 내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 전까지. 아무도 나를 몰라준다고 눈물짓던 시간이 길었다.  

마음을 다시 먹어본다. 나는 보지 못했던 오른 눈을, 각막을, 언젠가 누군가에게 기증하자고. 없는 것에 절망하지 말고, 가질 수 없는 것에 목말라하지 말고, 있는 것에 집중하자고. 내게 있는 눈으로 자연을 보고, 사람을 보고, 좋은 글들을 읽고, 노래를 듣고,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을 향유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하며 가치있게 살자고.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도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인생의 조각으로 인해 외로움과 적막한 시간이 찾아왔을 때 누군가가 쓴 글, 힘을 주는 노래들,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리셔서 부디 마지막 순간까지 죽지 말고 살아있어 주시기를, 쉬어가더라도 각자가 오르는 인생의 암벽에 꼭 붙어 계셔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오늘 하루에 발을 붙이고 조금 올라다가 맥이 풀어지면 쉬고, 쉬다가 조금 힘이 나면 다시 한 팔을 위로 뻗어 한 걸음을 오르면 어느새 각자가 살아야 할 몫의 정상에 올라 있을 테니. 그 정상이 다 다른 모습, 다른 방향, 다른 형태이기에 우리 각자가 더욱 귀중한,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사람들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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