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자리에서 흐르다 바다에서 만나자
구반포 아파트 55동 살던 시절 멍든 속과 슬픈 마음을 받아준 건 늘 너였지.
아빠에게 기절하기 직전까지 맞은 날에도, 사랑하던 사람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날에도, 독일로 떠나기 바로 전 날에도 네가 곁에 있어서 견딜 수 있었어.
너에게로 가려면 작은 기찻길을 지나 시멘트로 만든 요새가 있는 놀이터를 통과해야 했잖아. 기찻길에서 속삭이던 우리의 이야기가 너에게 들렸었을까?
다 알고 있어도 캐묻지 않는 것 같은 너의 깊이가 고마웠어.
샛별을 보며 조깅하던 날에도,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찬 바람맞으며 엉엉 울던 날에도 너는 나와 함께였지.
신혼여행 다녀와서 친정에 인사하고 떠나오던 날 집보다 네가 더 그리워질 것 같았는데.
이제는 8살 때부터 살던 5동도,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살던 55동도 다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여전히 흐르고 있는 너에게 감사해. 언젠가 나도 너처럼 흘러 바다로 가는 날이 오겠지. 각자의 자리에서 흐르다 바다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