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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nia Mar 02. 2021

다시 시작한 첼로 레슨

소소한 삶의 이야기 #1

온 세상 사람이 다 오케스트라 단원인 게 아니라고?



초등학교 6학년까지, 분명히 병원도 다녔고, 학교도 다녔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간식도 사 먹었건만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이 오케스트라 단원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늘 함께 식사를 하거나, 어디를 놀러 가거나, 우리 집에 드나드는 분들은 그분들이었으니까.


첼리스트였던 아빠가 연주를 하시던 날이면 서초동에 있는 콘서트홀, 광화문에 있는 콘서트홀..

어디서건  무대 뒤 대기실이 집인 양 신나게 돌아다녔고,

문을 지키던 무서운 아저씨들도 내가 지나가면 웃으며 문을 열어 주셨었다.


TV에 나오는 OOO교향악단 단원 분들은 멋진 연주자이시기도 했지만,

언제나 나를 번쩍 들어 안아주시고 귀엽다며 맛난 것을 주시는 친근한 아줌마, 아저씨였다.

그렇게 클래식이, 첼로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이었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강요한 적이 전혀 없었음에도 나는 어느새 자연스레 그 삶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6살 즈음이었을까? 기타만큼 작은 첼로를 선물 받아 가지고 놀면서, 내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게 길을 정하긴 했지만, 첼로를 전공할 때는 사실  행복하지 않았다.

OOO첼리스트의 딸로 살아가면서 첼로를 전공한다는 것은 늘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삶이었다.

 나의 연주와 실력이 오롯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아빠에 대한 평가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당연한 상황들로 인해 괴로운 시간이 많았다.


Sonia, 첼로를 바꿔야 해



어찌어찌 계속 전공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독일 유학생이 되어 있었다.

독일에서마저 나는 첼리스트 지망생, 혹은 음대생으로의 정체성을 가진 한 객체가 아닌, OOO첼리스트의 딸로 불렸다.

심지어 나를 직접 모르는 사람들마저 처음 만나면 너 OOO 선생님 딸이라며?라는 질문을 가장 먼저 던졌다.

잘해야만 한다는 생각.

아빠의 이름에 먹칠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늘 경직된 상태로 연습을 하고 연주를 하다 보니 손에 점점 무리가 왔다.

게다가 하숙집 아저씨가 사다 놓으신 첼로에도 문제가 있었다.

교수님은 레슨 때마다  너의 손을 위해서는 첼로를 바꾸어야 한다고 조언하셨다.


하지만 첼로라는 악기가 그저 원할 때 쉽게 사고팔 수 있는 악기는 아니었기에.. 내게 맞는 악기를 찾아다니며 계속 음대를 다니던 중 결국 2000년 중간시험Zwischenprüfung 때 무대에서 손을 다쳤다.

파우어라는 사람이 작곡한 현대곡.. 파워풀하게 연주를 했어야 하는 그 곡을 미쳐 다 끝내지 못하고 손이 굳어왔다.

마지막 8마디를 남겨두고 손과 팔목이 제대로 움직이지를 않아 활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주먹을 쥔 채 연주를 끝내야 했다.


이후 대여섯 곳의 병원을 다녀보았지만 모든 의사의 의견이 다 달랐다.

손의 통증은 점점 심해지는데, 인대, 근육, 신경 중 정확히 어디가 문제인지 알아내지를 못했다.

이곳저곳을 헤매다 손의 문제가 아닌 뇌의 문제인가 싶어서 별 별 검사를 다 받아 보았지만 그 어떤 의사도 완벽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첼로를 전혀 하지 못한 채 음대를 다녔다.

음악이론, 합창, 피아노(이상하게 피아노를 치는 방향의 근육, 인대, 신경에는 통증이 없었다), 연기, 움직임 등의 수업으로 학점을 채우며 졸업 직전까지 시간이 흘렀다.



너의 앞 날을 위해서라도 다른 길을 가야 하지 않겠니



2002년 여름 어느 날, 나를 많이 아껴주시던 학장님께서 면담을 요청해 오셨다.

이제 졸업 연주가 1년밖에 남지 않았는데.. 손이 나을 것 같지 않다면 다른 전공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고.

국비로 한 명의 음악가를 키워야 하는 학교를 위해서도, 앞으로 직업을 가지고 성인으로 살아가야 할 나를 위해서도, 아프고 속상하지만 결정해야 할 순간이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고.


언젠가 음대를 졸업하고 나면 하고 싶은 전공이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상황이 들이닥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결국 2002년 가을부터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공을 바꾸고 난 후 20여 년간 첼로 레슨을 받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이제는 내 업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사치라고 생각했다.


12월 사랑하고 존경하는 은사님을 코로나로 보내드렸다.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어 하셨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더 많이 연락드리지 못하고 더 자주 만나지 못했던 것이 괴로웠다.

내가 물려받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다는 것에 죄책감과 괴로움이 들었다.

12월 이후 하루하루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하던 중..

문득 우리 아버지마저 이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를 통해 내게 전해진 재능을 외면하면서, 그렇게 살다가 아빠가 떠나가시면 너무나 괴로울 것 같았다.



아빠, 나 다시 레슨 해줘요



얼마 전, 장르는 다르지만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몸과 시간을 다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음악을 너무 사랑했기에.. 만약 그 길이 아닌 것 같으면 아예 그만두려고 했다지.

자신이 물려받은 재능에 충실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그 최선의 결과물에는 변명하지 않는다는 그 삶의 자세를 보며 너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애증으로 점철된 나의 첼로 인생..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데, 사랑하기도 전에 책임과 의무가 가득했던 시간들..


23년 만에 아빠께 다시 레슨을 부탁했다.

다시 7살 어린아이로, 처음 레슨을 시작했던 시간으로 돌아간 듯

한 음 한 음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를 걸음마를 새로 배우듯 다시 배워가고 있다.


레슨을 다시 시작한 후, 첼로를 떠올리는 한 순간 한 순간이 감사하다.

이제는 애증이 아닌 사랑으로 내게 물려진 작은 재능에 감사해야지.

내가 원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진 선물에 대해 무시하거나, 원래부터 내 것이었다 자만하거나,

내가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며 키워가 봐야지..


누구에게 배우든 늘 무섭기만 하고, 괴롭기만 했던 첼로 레슨.

이젠 다음 레슨이 기다려진다.

언젠가 온전히 한 곡을 연주하게 될 수 있기를.

나의 음악이 누군가에게 삶의 한 자락 소망이 되는 그 날이 오기를.. 소망해본다.


#첼로 #첼로연주 #레슨 #새로운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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